2012년 3월 31일 토요일

브라켈의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빌헬무스 아 브라켈의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4권 전체를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후배 Laurence O'Donnell이 일을 저질렀다.
무엇보다 번역자 Bartel Elshout가 너그러운 공유를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당장, 다운로드 들어간다!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Q Bible 성경연구 사이트

참 성경공부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형광팬 필요 없다.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거든. 

히브리어, 갈대아어, 헬라어 잘 모르시는 분들도
배우면서 쭉쭉 읽어갈 수 있도록...캬~~~
기분나쁜 거 발견되면 뾰족한 멘트 곧장 날릴 수 있도록
아담한 독자댓글 공간까지...

사이트의 목적은 성경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정확하고 철저하고 자유롭게 보급하는 것이란다. 
이런 '엉뚱한' 괴짜들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든다.
쌩유~~~

Q Bible Website for a Biblical Research

Biblia rabbinica 1524-5

랍비성경 원본(Biblia rabbinica) 이 필요하다.
1524/25년에 Daniel Bomberg가 베니체에서 4권으로 출판한 성경이다.
권별 가격이 2-3천만원 정도로 추정된다.
4권이면 1억이라 보아도 무방할 고가의 성경이다. 에효...ㅡ.ㅡ 

물론 20세기(1972)에 펙시밀리 재판본이 나왔지만
역사신학 학도로서 16세기 원본에서 눈을 뗄 수 없음은 당연지사.
허나 아무리 샅샅이 뒤져 봐도 PDF 다운로드 불가하다.
1524/25 당시 판본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도 없는 듯하다.
 할 수 없이 1972년 재판본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칼빈 도서관은 Interlibrary loan이란 서비스를 제공한다.
빌려달라 신청하면 해당도서 소장한 기관들을 찾아 빌려주는
느무느무 고마운 시스템 되겠다.
이걸 활용하면 시간/머니 무진장 절약된다.
 아무리 이런 제도가 협조해 주어도 원본을 찾지 못한
마음의 허탈함은 달래지지 않는다.
꿈에라도 나타나면 좋겠는데...ㅡ.ㅡ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주님만 의지하자

난 오늘 각주 하나 겨우 다는 것과 하루를 거래했다...
ㅡ.ㅡ 에효~~~

허나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든든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의 댓가라 생각하니
미소가 무거운 실망을 뚫고 얼굴에 번진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미련하다.
맞다. 이건 무섭도록 명확하고
일말의 예외도 허락되지 않는 보편적 진리이다.
하나님이 계신데도 마치 안계신 분인 것처럼
그분를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동일하게 미련하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삶의 힘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의 힘이다.
그것을 알게 하는 죽음처럼 지독한 절망의 밑바닥 경험들로
삶이 점철되는 생의 순간들을 누구나 거친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시편이 과격해!

진리의 과격성에 대해서는
시편이 바울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의 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그가 관통한 고난의 험한 가시밭길 여정보다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못나고 가벼운 왕이 체통도 버린 채 닥치는 대로 오버하는
다열질 언습에 거부감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아무리 열을 받았어도 그렇지,
남의 영혼에 대해 생명책 기입까지 관여할 건 없잖아.

난 다윗의 이런 기질을 부인하지 않는다.
집권시 까불던 자들의 숙청을 말기에 아들에게 주문한
사실만 보더라도 불의한 자들의 무법한 광란을
눈감고 지나갈 위인이 아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시편이 성령께서 다윗의 입술을 빌어 말씀하신
것이라는 히브리서 구약인용 방식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다윗의 격한 언사는
본인의 성격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진리의 실재성, 추상 같은 엄격성도 보여준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에
어떠한 맛사지도 가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이토록 실감나고 와 닿도록 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하늘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고 내리는 은밀한 진리의
실재성을 표상하는 시적인 방식이 시편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을 날마다 읽으면
한편으론 인간적인 속이 후련해 지고
다른 한편으론 진리의 구체성이 엄습한다.

이러한 의미의 중첩이 날마다 의식의 DNA 속으로 파고들면
나그네의 여정을 제대로 살아가는 자가 되리라는
기대감 속에서 또 하루를 연다. 

2012년 3월 25일 일요일

바울의 과격한 언사가 궁금하다

만일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대체로 과격하고 직설적인 언사를 구사한다.
심지어 사랑을 논하는 고전 13장에서도 
예언과 지식과 믿음의 고유한 가치에 금이 갈 정도로 
가볍게 상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제끼고
사랑의 압도적인 우선성과 우월성 강조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르쳤던 진리의 복음과 다른 걸 전하거나
더하거나 빼는 경우에는 사도들은 물론이고 천사라도 
저주의 명단 아랫묵을 차지하게 될 것이란다.
이게 다 그의 격정적인 회심과 삶의 스타일에 
걸맞은 필치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겠으나 
뭔가 다른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게 궁금하다.

바울의 언사는 
동시에 애매함과 복잡함이 없이 단순하고 명료하다.
아기자기 아리까리 군더더기 수식어가 없다.
물론 우리의 어그러진 죄성 탓에 모든 게 헛갈린다. 
하여 성령의 조명 없이는 한 마디도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바울의 언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진리의 차원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은 격차 때문이다.
예수님의 동문서답 식의 의사소통 사례들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 문맥에서 던져진 물음에 결박되는 방식이 아니라
질문자의 선 자리로 적응하되 그를 진리의 차원까지 끌어올려 
주께서 하시는 말씀를 듣도록 하는 방식의 화법 말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저주와 동급이다.
기분이 나빠지고 상식이 뒤틀려도 타협은 불가하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의 수혜자가 된다는 사실,
상식과 다수결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니기에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침해하는 듯한 과격성이 느껴진다.
좌우에 날 선 검보다 예리하고 섬뜩하다.

허나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운 세상의 실상에서 보건대
바울과 같이 지반을 뒤흔드는 화법의 과격성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을 빌미로 
우리의 혹시 추한 언사를 정당화할 생각일랑 접으시라.
성경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를 구분하지 않는 게
자유주의 신학의 세련된 면이면서 동시에 무서운 함정이다.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선하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고상한 언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
할수만 있다면...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하나님을 경외함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그 사실성을 절감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확인되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도 지혜롭고
'깊은' 학식의 소유자가 된 자를 만나지 못하였다.

아는 것이 많아 똑똑한 경우는
지혜롭고 깊은 학식의 소유자는 아니다.
나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어서
그가 커보이는 현상이며 착시일 뿐이다.

하나님 경외가 지혜와 지식의 본질이며 근본인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창조의 원리를 벗어나서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면
교만에 이르는 지식의 희생물이 되는 건 사필귀정!

스펙으로 껴주지도 않을 하나님 경외는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 한다면 거들떠도 안볼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아닌 그것이
지혜와 지식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요
그 자체가 가장 깊은 지혜와 지식이란 사실을
일평생 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교회다운 교회의 회복

사귀지도 말고 내쫓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에서 음행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내어 쫓으란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 탐하는 자, 
토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거든.

교회는 하나님의 법이 무엇이고
어떻게 통용되는 곳인지가 드러나는 현장이다.
최소한 그런 명시적인 부르심을 받은 곳이다.
음행자를 사귀지도 말고 내보내라 한 것은
교회에서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음행이 있음을
통탄한 바울의 언사였다. 

그러나 단순히 성적인 음행만이 아니다.
교회에서 돈, 명예, 권력을 비롯한 온갖 악취나는 
모든 음행들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취함이 마땅하다.
물론 그렇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면
교회에 남아날 사람들이 없을 위험성도 있겠다.
교회의 공중분해 가능성이 현실화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교회의 존립에 적신호가 아니라 
교회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이유의 청신호다.

물론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지 못한다.
타인의 티끌을 건드릴 정도로 
자신의 들보가 해결된 사람은 없기에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공염불일 수도 있겠다.
허나 지금 환골탈퇴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다.
나부터, 지금부터, 가까운 곳에서, 적은 것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나 자신을 돌아보며
소박한 실천이 싹트는 하루이길 소원하는 아침이다...

2012년 3월 19일 월요일

신학의 길

신학생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들을 위해서 살겠다고,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희생해 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비록 직장이 그렇게 귀한 데지만
신학교 공부는 직장을 마련하려고 하는 공부는 아닌 줄을
여러분께서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일은 직장으로 계획을 해서 시작하는 게 천번 만번 옳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신학 공부를 직장으로 계획하고 직장으로 가질 때에
그것은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 크게 해를 끼치는 일이요
교회를 해롭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파수꾼이라고 하면 주님을 위하여 살되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분명한 주님의 말씀을 위하여
한평생을 제물로 드리는 겁니다.
전적으로 이 몸을 바치고 생명을 드려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굶든지, 살든지 죽든지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여기고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나는 주의 말씀을 파수하는 주님의 파수꾼으로서
그 일을 영광으로 삼고 그 이상의 영광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고
인생으로서 이 세상에 나온 본의가 있는
보람된 삶이라고 단정하고 나선 것이
우리 신학생들이란 말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부르심, 네 꼴보고 은혜를 받겠느냐] p.69-70에서...

2012년 3월 18일 일요일

주님의 지혜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이 말씀 한 마디에 온 세상이 저울질 당하는 느낌이다.
주님의 크심이 뭉클하게 느껴지는 주일아침...ㅡ.ㅡ
소속과 관계를 자랑으로 여기고 실제로 자랑한다.
그렇게 사람을 자랑하는 중에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주님의 표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계하지 못한다.

날마다 책을 붙들고 사람들의 생각을 헤집으며
옥석을 가리고 서열을 따지고 취사선택 작업을 반복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선물의 부재로 인한
가슴 밑바닥의 허전함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주님의 지혜로 충만하고 싶다는 갈망이 절박하다.
오늘은 주님의 지혜를 한없이 생각하고 향유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한다.

골프 시즌이다

바야흐로, 골프 시즌이다.

하루에 두번 뒷마당표 '필드'에 나간다.
소화력이 저하된 불혹 이후로는 필수적인 식후활동 되었다.
총 소요시간 20분, 충분하다.
3번 채로 100회 정도만 휘두르면 더브룩한 속사정이
깨끗하고 시원하게 해소되는 하루치 운동량이 확보된다.

선배들이 남기고 간 녹슨 골프채가 많다.
소화불량 학우들은 허락 없이 기냥 가져가도 좋다.
이것보다 더 효율적인 소화비법 발견하지 못하였다.
사실 골프채를 휘두르면 악력도 길러지고
혈액순환 잘 되고 소화는 물론이고 상쾌한 자연을 흡입하며
주께서 행하신 놀라운 지혜를 묵상하는 기회도 얻는다. 

물론 애꿎은 잔디는 파헤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 및 적정한 힘조절이 요구된다.
또한 실제 골프공 사용해도 야단난다.
플라스틱 공이면 딱이다.
멀리 날아가지 않고 다치거나 깨질 염려도 없으니까~~~
게다가 12개에 2달러면 해결된다.
난 그걸로 1년째 버티고 있다.

20분/2달러 투자하여 이런 효과 거둘 수 있는 대안 있으시면
재보해 주시라...ㅎㅎㅎ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사상적 독립

먹는 것이 어떠한즉 그 위인도 그러하고
읽는 것이 어떠한즉 그 위인도 그러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즉 그 위인도 그러하다. 

책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건낸 등교길 멘트였다.
생각이 아빠보다 깊어야 사상적 독립이 가능하다
라는 멘트도 곁들였다...ㅎㅎㅎ 못알아 듣는 눈치!

2012년 3월 13일 화요일

고난도 유익이라

범사에 감사하는 건 은밀한 이유가 있어서도 그렇지만
혹독한 자기부인 연습이기 때문에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이다.
시간이 지나면 파고가 출렁이던 상황도 진정되고
격했던 감정도 거짓말 같이 사그라 든다. 

우리의 현실을 건드리는 수많은 것들의 겉표정에 놀랄 것 없다.
어떠한 것도 곧 지나갈 것이거든.
만약 지나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지나가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이다. 

감사냐 불평이냐, 화평이냐 분노냐의 기로에 떠밀릴 때마다
우리는 사태의 이러한 본질보다 우리의 현실을 건드리는
쉬 사라질 그놈의 겉표정에 너무나도 충실히 반응한다.
문제는 사태가 수습되고 정신을 가다듬을 즈음이면 붙들어야 할
본질의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다는 거다. 

폭풍우 중에라도 감사하고 평안해야 할 그 기회는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런 순간이 제발로 걸어서 오는 상황을 쌍수로 맞이하는 게 지혜이다.
죽기보다 어려운 줄 안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부활의 맛은 죽음 같은 자기부인 속에서 경험된다. 
삶의 원리가 송두리째 역전되는 이러한 기회의 겉표정은
죽을 맛이라는 거 동서고금 막론하고 진리이다... 
힘들지 않은 사람 없다. 유익의 영역을 고난과 죽음까지 확장하는 수밖에 없다...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토마스 아퀴나스 정복하자!

Corpus Thomisticum: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베스트 오브 베스트 사이트다. 토마스의 라틴어 전집이 수록되어 있고 무엇보다 토마스 렉시콘(Thomas Lexicon)이 제공된다. 중세의 신학적 전문용어 전체를 커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말 탁월한 사전이다. 토마스에 대한 연구 현황도 검색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칼빈의 경우는 이런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작심을 하고 팀을 이루어서 작업하면 좋을 일이다. 죽도록 고생해서 만든 다음 무료로 공유하는 작업 말이다...

도미니칸 수도회의 아퀴나스 영역본: 라틴어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아퀴나스 문헌은 거의 다 번역되어 있으니까. 롬바르드 [명제집] 주해서와 [대이교도 대전]과 [신학대전] 및 다양한 성경 주석서와 그 유명한 [카테나]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들이 영어로 번역되고 원하는 주제나 본문을 아주 편하고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디자인된 사이트다. 정말 성실하다. 

신학과 철학


신앙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철학이나 이성이 차지하는 고유한 역할은 교회사의 역사 속에서 한번도 거절된 적이 없습니다. 비록 특정한 경향성을 비판하고 신적인 계시에 의해 주어진 진리의 탁월성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철학이나 이성의 인간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경계한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라도 여전히 이성의 활동과 철학의 충만 속에서 주장과 거절과 수용이 진행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철학이나 이성을 타매하는 방식으로 신앙적인 진리의 절대성을 확보하는 처신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 있어 보입니다.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에 누구도 반감을 표시할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라도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목적을 수행하는 수단이나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못하게 하는 무의식적 화법이 아닐까 라는 혐의를 털어낼 수가 없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을 지나치게 신봉하며 대카르트 철학은 고대철학 이후로 마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탁월한 이라던 옥타브 하멜린(Octave Hamelin)의 과장에 대해 당시 데카르트 철학을 전공하다 중세의 가치를 발견하고 중세로 뛰어든 카톨릭 철학자 에띠엔 질송(Etienne Gilson) 저스틴 마터에서 니콜라스 쿠사까지 초대교회 당시부터 15세기까지 진행된 기독교 사상을 샅샅이 뒤지고 탐구하여 교회사의 어떤 순간에도 철학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반론을 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기독교 철학의 특성들은 이런 것입니다. 1) 철학은 신학적 문맥 속에서만 발견된다. 2) 신앙은 거룩한 계시의 영적인 진리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구한다. 3) 이성의 원리들은 믿음의 근본적인 항목에서 유래한다. 4) 이성은 계시나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데 이는 모든 것들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질송이 진술한 기독교 철학의 내용들은 중세의 철학을 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탐구한 것이지만 종교개혁 정통주의 시대에도 신학이 그런 특성들과 결별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철학의 수용과 활용은 중세를 비롯한 이전 시대의 방식과 동일할 수는 없었고 약간의 변경과 발전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정통주의 시대에는 신학을 하되 늘 주변학문 전체를 의식하며 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자세로 진리와 씨름했던 때입니다. 사실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학문 분야들 사이의 관계성을 다루는 것을 넘어 분야로 대표되는 신학과 인간이 다루는 모든 제반 학문들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성이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어야 것입니다. 철학을 다양한 학문들 중의 분야로 국한하는 것은 사실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따라 추구되고 있는 깔끔한 분할법의 희생물이 되는 첩경일 것입니다. 지금은 철학과 다른 것들을 구분하는 금을 긋는 방식으로 철학을 이해하는 유아적 발상의 성숙한 전환과 무엇이든 통으로 보는 사유의 필요성이 절박한 분할주의 시대 같습니다.

철학의 어원적 의미는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적인 지혜 그것에 도달하는 방식인 사랑 의미일 것인데, 성경은 지혜 일컬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당시의 질서를 움직이던 엘리트 집단이라 관원들도 몰랐던 것이며 그런 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죄성 때문에 우리는 수만 있다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태도에 하나의 이념적 명분으로 옷을 입혀 하나님이 지으신 것과 이끄시는 질서까지 거부하고 훼손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비록 ‘우리 철학에 대해서는 버리고 부인하는 몸부림에 목숨이 끊어질 것까지 각오해야 되겠으나 문제의 본질인 우리의 주목하지 않고 철학 부인의 대상으로 삼아 주님의지혜 사랑하는 마땅한 도리마저 져버리는 엉뚱한 진단과 거절을 경건의 방편인 것처럼 옳다 여긴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철학을 움직이는 인간의 지성적 주체로서 이성(ratio) 지목했고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의 노른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바르게 사용할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철학의 특정한내용들을 거부했던 과거 선배들의 단호한 태도를 오해하여 철학 자체를 거부하면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상속하는 적통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배움에 대한 불성실의 정당화 내지는 변명일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잘못된 철학적 내용들을 신앙의 문제에 무작위로 적용하여 성경에 기록된 진리마저 무관심의 언저리로 밀어내는 오만까지 방조해야 된다는 아닙니다. 교만 공작소라 그릇된 지식의 기독교적 진리 속으로의 무례한 침투와 활보 단호히 배격하며 타협이나 용납의 흉내조차 내지 말아야 일입니다. 그런 균형점을 찾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비록 찾았다 하더라도 지점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교부들과 중세의 여러 경건한 선배들이 고수했던 것처럼 이러한 지식에 이르는 가장 우선적인 방편은 믿음이며 당연히 믿음은 이성에 선행하며(fides praecedat rationem) 동시에 이해를 추구하는 (fides quaerens intellectum)입니다. 어거스틴 표현을 빌리자면, 사실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nisi et aliud esse credere, aliud intellegere). 나아가 비록 신플라톤 사상에 심취한 분이지만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 같은 카롤링거 문예부흥 시대 신학자는 참된 철학이 참된 종교이고 역으로 참된 종교는 참된 철학(ueram esse philosophiam uram religionem conuersimque ueram religionem esse ueram philosophiam)’이란 말까지 했습니다. 다시 어거스틴 입장을 살펴보, 사물을 규정하고 구분하고 배열하는 실질적인 학문(scientia realis) 사람의 이성에서 고안된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성의 본성 자체에 내재된 원리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 자체에 대한 물음과 거절보다 학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바른 방법론에 관심을 쏟습니다. 그리고는 사물의 실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 포함되는(complectendum) 경우나  실체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생략되는(praetereundum) 경우에는 추론적인 진리가 오류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창조자의 의도가 가감되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최상의 방법임을 강조한 셈입니다.

안셀름은 진리를 절대적인 지고의 진리(summa veritas), 사물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진리(veritas in rerum existentia) 사유의 진리와 명제적 진리(veritas cogitationis et veritas in propositione)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있는 진리의 근원(causa)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컫는 것이고 사유와 명제의 진리는 그것의 결과라는 인과적 관계성을 논합니다. 그는 또다시 이성으로 이해된 진리 혹은 관찰에서 지각되는 진리와 마음 자체에서 포착되는(sola mente percipi) 진리로 구분하고, 눈으로 관찰된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포착될 있는 올바름(rectitudo) 바로 진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안셀름도 인간의 마음이나 이성이나 오관 주도적인 인식론 이전에 믿음의 전제를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도 이방인을 설득하여 믿음을 갇도록 목적으로 순수한 이성의 작용만을 사용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시도가 아닙니다. 안셀름이 살던 시대에 기독교는 상식이며 같은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며 교류하던 동료들의 공동체로 수도원에 그가 머물러 있었다는 정황을 조금만 고려해 본다면 그의 신존재 증명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일환임을 쉽게 확인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안셀름도 비록 중세에 내노라 지성인의 사람으로 학문적 역량을 왕성하게 발휘한 분이고 기독교 철학의 명맥을 이어간 거인들의 대열에 포함되는 분이지만 인간이 가진 이성이 피조된 것이며 창조자가 그렇게 설정해 이성의 한계를 몰랐거나 부인했던 분은 아닙니다. 그는 이성의 작용을 마음 자체에 대한 것과 물리적인 사물에 대한 것으로 구분한 마치 순수이성 문제를 선험적 가상의 오류로 풀어낸 칸트의 사상을 과거에 평범하게 주장되어 상식의 카피에 불과한 것처럼 만드는 논지를 펼칩니다. 이성적인 마음(mens rationalis) 자체에 대한 사유를 통하여(seipsam cogitando) 스스로를 이해하려 때에 이성의 작용을 통하여 그것의 유사물(similitudinem) 혹은 그것에 대한 인상(impressione) 따라 자체의 이미지(imaginem ipsius) 형성되는 것이며, 이성적 활동이 없었다면 마음과 마음의 이미지는 분리될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꼬집어서 말합니다. 그는 또한 마음이 물리적인 사물을 생각할 때에도 이성으로 인해 사물 자체가 아닌 어떤 (aliud quod ipsa non est)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실제적인 사물과 그것의 유사물 사이를 어떻게 구분할 있는지 방법을 모른다는 것에 있답니다. 창조된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것들이 인간의 지식에 존재하는 방식과 대단히 다른데(multo aliter) 말입니다.

어거스틴 안셀름이 말하는 인간의 이성 혹은 학문은 아직 죄의 개입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창조된 인간성 자체가 가진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면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가지고 만물의 객관적 실체를 보도록 창조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믿고 수용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그대로 보는 그런 방식으로 진리를 인식하는 장치가 인간의 본성에 내장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지식의 본질은 진리 자체시며 모든 진리의 근원이며 그의 안에서만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떠나면 지식은 교만의 화신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부터 조성하신 지식의 하나님 의존성을 버리면, 결국 본질을 이탈하고 스스로를 본질의 본좌에 앉히면서 참된 본질을 밀어내는 교만의 광기는 제어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본성 전체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성이나 지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방위적 독립성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은 물론이고 학문의 영역들도 영향권 안에 있으며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는 와중에서 발휘되어 기록된 성경의 진리를 인간화된 진리로 대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버려야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이성의 활동이 아닙니다. 학문과 지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학을 버려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마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밀 하나님을 떠나서도 얼마든지 있고 생각할 있고 이해할 있고 결정할 있다고 판단하는 인간의 방자한 자존성 옹고집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버리면 세상에는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불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고 무익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것입니다. 진정한 지식의 세계로 진입할 있습니다. 참된 학문과 참된 철학이 창조적 질서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에 대해서도 감격과 찬동의 탄성을 지르게 것입니다.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필요한 것이며 유용한 것이며 즐거운 것입니다. 모든 학문적 역량의 최대치를 발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은  헤아릴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일평생 배움의 길을 접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측량할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  심장의 박동과도 같은 철학의 왕성한 본성을 잠잠케 없었던 탓입니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만드신 만물과 행하신 일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진리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이를 얻기 위해 만물과 역사 전체를 뒤집어 털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탐구의 길을 접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