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5일 목요일

삶이라는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25:17). 천국의 비유로 언급된 달란트 이야기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전체가 달란트다. 각자가 받은 분량은 다양하다. 주께서 결산의 때에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기 때문에 분량의 차이가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분량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결산의 때에 각각의 다양한 분량은 모두 "적은 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야기의 초점은 남김과 남기지 않음, 혹은 착하고 충성됨과 악하고 게으름의 여부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에 충실해야 한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유쾌한 일들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남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난도 달란트고 환란도 달란트고 고통도 달란트고 심지어 죽음도 유익으로 분류되는 달란트다. 그런 용광로 속에서 황금의 인격과 경건이 빚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주께서 "충성"으로 여기시는 무언가를 남기도록 최고의 지혜와 경건을 발동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편하고 억울하고 답답한 나의 상황을 불평과 원망의 구덩이에 파묻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면 죽음을 인자의 영광이라 하셨던 주님과 고난을 유익이라 했던 다윗과 죽음도 유익이라 했던 바울 앞에서 한 마디의 변론도 내뱉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길 가능성이 높다. 삶은 어떤 이에게도 녹록하지 않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것을 남기려는 전투적인 자세가 모두에게 늘 요구된다. 그런 자세에서 나오는 경건의 빛은 더욱 찬란하고 교훈의 향기는 더욱 진동한다.

2016년 8월 21일 일요일

사랑의 역설적인 명령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12:30). 벼룩의 간을 꺼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위의 말씀은 모든 것들을 다 가지셔서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 먼지에서 온 미약한 인간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 바쳐서 사랑할 것을 명하시는 것이 마치 졸열한 독재자의 잔인한 착취로 오해될 수 있는 구절이다. 사실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는 사랑의 주객이 뒤바꼈다. 왜?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로는 생산할 수 없는 진리의 비밀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동원된 하나님의 역설이다. 사랑의 명령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쌍방통행 사랑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며 믿어지지 않는 영광이다. 그 사랑에 목숨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동원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누리는 최상의 방식이다. 사랑은 진실로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의 목숨과 마음과 뜻과 힘에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생명과 마음과 뜻과 힘을 전부 담으라는 역설적인 은총이다. 사랑은 이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취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을 전인격적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명령은 자신을 기필코 주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2016년 8월 20일 토요일

복의 주관자, 있다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신28:8).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을 인과응보 개념으로 이해한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올라가고 성실하게 일하면 소득이 올라가듯 우리가 원인을 제공하면 당연히 주어지는 결과가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자연이 굴러가는 비인격적 질서의 바퀴만 주목하지 않고 그 바퀴를 굴리시는 복의 인격적인 주관자가 계시다고 가르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하심이 없이는 어떠한 복도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의 눈에 확인되는 복의 가시적인 인과율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인과를 만드시고 명하시는 복의 주관자가 계시다는 주장이다. 모든 복은 어떤 질서에서 생산되지 않고 복의 주관자에 의해 주어진다. 그래서 복된 신앙은 반듯한 규칙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의 인과적인 겉모습만 주목하고 자연의 질서와 규칙을 만드시고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배제한다. 보이지 않는 마지막 근원까지 소급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가까운 원인에 안주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판단을 맡기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거기에 매달린다. 이런 맥락에서 우주의 창조에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선언한 스티븐 호킹은 대단한 분이지만 안타깝다.

2016년 8월 19일 금요일

백주의 캄캄함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신28:29). 이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이 임하고 거역하면 저주가 임한다는 문맥에서 후자의 한 사례로 등장하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정상적인 시력이 있고 빛이 협조하는 백주에도 캄캄한듯 더듬게 된다는 저주의 내용이다. 사실을 감추고 왜곡하고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대량으로 살포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모든 시대의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을 모두가 공유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분석으로 도달한 결론에 모두가 공감해도 여전히 "백주에도 더듬는" 저주의 상황일 수 있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한다. 일례로, 개인의 자유로운 '성'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유와 평등의 기묘한 논리가 성의 질서를 주장하는 적잖은 선진국 안에서는 동성애, 소아성애, 시체성애, 짐승성애, 가족성애 등을 제어할 논리적인 대응책이 없다. 최근에는 성인이 된 아들과 그의 엄마가 성관계를 맺고서 성적 지향의 자유를 내세우며 합법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원숭이와 개와 고양이와 시체와 결혼하는 일도 실제로 발생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모든 짐승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미명으로 사람이나 짐승을 성의 무차별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그러한 부도덕을 승인하는 문화의 공공연한 범람은 신명기의 관점으로 보자면 백주에도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더듬는 저주의 일환이고 불순종의 결과이다. 비록 사안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회개와 순종을 모든 시대의 열쇠라고 보는 이유이다. 

2016년 8월 8일 월요일

가증한 신앙의 악취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미3:11). 미가의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리더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가관이다. 종교적 위선이다. 종교적 위선자가 위선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을 의뢰한다. 자신의 위선을 여호와 의뢰라는 고상한 포장지로 가리고 잇속을 챙기면서 타인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한다. 그런데 이렇게 끔찍한 위선이 교회의 현실이다. 한 시대가 통째로 무너지되 분야별 부패의 아귀가 너무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현실, 통탄이 저절로 쏟아진다. 이러한 기독교의 총체적인 부패는 미가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삼박자 부패의 악취는 교회 안에서 진동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니까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망상 속에서 돈을 위하여 설교하는 목사와 뇌물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장로와 댓가와 비례해서 섬기는 집사가 적잖은 교회를 접수하고 있다. 미가 시대의 부패상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반응에 변화가 없으시다. 회개가 시급하다. 함께 엎드리자.

2016년 8월 6일 토요일

하나님의 역린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욘1:15).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킨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요나는 거절한다. 민족에 대한 애국심과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도 져버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여야 하는 선지자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자신을 움직이던 모든 변수들을 내던져야 했다. 하지만 민족적인 원수의 본거지인 니느웨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과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역방향 행보를 택하였다. 개인의 속은 후련했고 민족들도 열광했을 선택이다. 그러나 배에 동승했던 이방인은 요나를 바다에 투척하여 선지자가 초래한 위태로운 상황을 깔끔하게 수습했다. 흉용하던 바다의 잠잠케 됨은 이방인의 판단과 노고의 결과였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를 크게 경외했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고백까지 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줄행랑을 치던 선지자의 가오와 채면이 처참하게 구겨지는 경우였다. 하나님의 뜻 이외의 다른 변수가 움직이는 선지자의 그릇된 행실은 교회가 사회에 종교적인 순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회가 교회를 꾸짖고 교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법과 불륜과 음행과 부의 축적이 좌우하는 오늘날의 적잖은 신학자와 목회자와 교회도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진노의 시대이다. 안타깝고 처참하다. 나 자신부터 돌이켜야 한다.

2016년 8월 5일 금요일

십자가의 역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이는 자신의 피해와 타인의 유익이 인과의 짝을 이루고 있다는 다소 불쾌한 십자가의 역설이다. 나에게 가해진 손실이 너에게 주어지는 유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밟히지 않으려면 밟아야 한다는 사회적 약육강식 논리의 역발상 도식이다. 밟아야 밟히지 않는 상황을 해소하는 세상의 최고급 절충안은 서로 밟히지 않고 공공의 유익을 누리는 윈윈 전략이다. 그러나 "서로"라는 선형적인 범주가 "우리"라는 비선형적 전체로 확대되면 2인분의 윈윈 전략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죄로 말미암아 무너진 이 세상에는 어쩌면 모두가 좋아지는 길이 본질상 없는지도 모르겠다. 주님은 우리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받으셨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사하려고 찔리시고 상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이신데 다른 방도가 없으셨던 걸까? 너무도 억울하고 부당한 유죄의 상황에서 변론 한 마디도 없으셨고 추가적인 항소도 취하지 않으셨다. 그냥 당하셨다. 왜? 먼저는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건지기 위함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적 삶의 원리를 친히 보이셔서 가르치기 위함이다. 너무도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데도 환영이 아니라 핍박을 당하는 방식이 요청되는 역설의 원리를.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리이다. 

종교적 아이러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암4:5). 이스라엘 민족과 열방의 불의를 고발하는 아모스의 입술에서 출고된 특이한 증언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열방의 불의를 동일하게 저지르되 그 양태가 해괴하다. 그들은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 가서는 증폭된 죄를 범하면서 아침마다 희생제를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헌납하고 누룩을 넣은 인위적인 수은제를 드리고 낙헌제를 선포했다. 벧엘은 그 의미가 "하나님의 집"이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최고의 복이 임하였던 장소이고 길갈은 약속의 땅에 입성한 후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했던 곳이고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이 사사직을 수행했던 곳이며 사울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였다. 그런 곳에서 예배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동시에 온갖 죄악의 소굴로도 쓰였다는 것이 아모스의 고발이다. 같은 입술에서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쏟아지고 한 사람에 의해서 선행과 악행이 동시에 발생하고 동일한 장소에서 예배와 불경이 일시에 벌어진다. 예배자가 불경을 저지르고 설교자가 폭언을 쏟아내고 목회자가 겁박하고 증인이 거짓을 제조하는 어이상실 현상의 역사는 참으로 장구하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런 현상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뻐하는 바'였다고 직언한다. 동의하기 어렵고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실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형벌은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고 아모스는 기록한다. 사활을 건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2016년 8월 4일 목요일

명령: 희생적인 사랑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호1:2).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행했기 때문에 떨어진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시적인 징계와 형벌이다. 그런데 이 명령에서 왠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긍휼도 읽어진다. 이는 호세아의 선지자 직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도 어울리지 않는 해괴한 명령이며 이스라엘 백성과 세상 사람들도 경악했을 그런 명령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께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호세아는 물론이고 명령자인 자신의 거룩한 권위와 신적인 위엄까지 스스로 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 사람들 모두의 조롱과 비난을 자초할 명령을 내리셨나? 백성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자신에게 뻔한 손해와 불이익이 주어질 명령을 내리신 다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동일한 사랑이 호세아와 동일한 이름을 가지신 예수 안에서도 발견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신적인 권위와 영광과 위엄을 스스로 등지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침뱉음과 따귀와 채찍질과 능욕을 당하시고 억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실 것을 알면서도 그러셨다. 희생적인 사랑이다. 사실 하나님께 저질러진 죄의 심각성은 이런 사랑에 의해서만 제대로 인식되고 그런 인식에 의해서만 온전한 회개와 돌이킴이 가능하다. 호세아가 받은 명령도 그런 회개과 돌이킴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다. 

주님과의 동행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33:8). 하나님은 백성이 죽음에 이르는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는 경고의 나팔을 에스겔의 손에 맡기셨다. 그리고 파수꾼이 백성에게 죽음의 칼이 임한 상황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는다면 그들의 핏값을 그에게서 찾겠다고 말씀한다. 타인의 핏값을 책임질 만한 자격과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데도 그러신다. 이유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백성의 패망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확고한 마음 때문이다. 2) 패망을 막아야 하는 소명자의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3) 소명자와 백성은 믿음의 운명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4) 백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는 것이 소명자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5)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백성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핏값을 대신 지불하실 것을 예표하기 위함이다. 6)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총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목회자는 성도 개개인의 사사로운 죄까지도 어깨에 짊어지고 교회가 죽으면 나도 죽고 교회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는 불가분의 하나됨을 의식하며 목회해야 한다. 타인의 핏값을 나에게서 찾는다면 이성을 따라서는 억울하고 부당한 마음이 앞설 것이지만 믿음을 따라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식이다. 주께서 걸어가신 길은 최고급 비단이 깔리고 번뜩이는 보석들이 촘촘히 박힌 영광의 길이 아니라 각양의 뾰족한 가시들이 사방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길인데도 부르시니 영광이다.

2016년 8월 3일 수요일

용납될 수 없는 목회자의 범죄들 (1561 제네바 교회법규)

이단
분리
교회 질서에 대한 거역
민사 처벌에 합당한 명백한 신성 모독
성해 매매 및 모든 타락한 선물들
다른 목회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술책
합법적인 휴가 및 정당한 볼일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교회를 방치하는 것
사기
위증
음란
절도
음주벽
법적 처벌에 합당한 싸움
고리대금
법에 금지되고 추문을 일으킬 만한 놀이
춤과 그 유사한 풍기문란
국가 비방죄
다른 이로 하여금 교회를 분리케 하도록 하는 범죄

해결자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4). 미친 소비주의, 음탕한 혼합주의, 무분별한 다원주의, 오만한 합리주의, 경제적인 약육강식, 군수 산업체의 광기, 극단적인 IS의 야만적인 살인과 테러의 심각성은 모두가 공감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해결책이 없다. 비록 문제 해결의 절박한 소원도 있고 요란한 달음질도 해보지만 사람의 힘과 능으로는 풀어지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무기력만 확인한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하게 문제를 풀어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미시적인 문제도 상황과 해법은 동일하다. 경제적인 빈곤, 생명의 위협, 관계성의 문제, 미래에의 절망, 건강상의 위기, 정신적인 공황도 우리 각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에 사활을 걸라는 메시지요, 표면적인 문제를 계기로 삼아 궁극적인 필요가 채워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구제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크든 작든 모든 문제는 당하고 아파하고 억울하게 손해보는 역설적인 십자가의 교훈으로 풀어진다. 문제 자체가 십자가의 도를 붙들라는 초청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면,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고 그의 이름이 존귀케 되는 방향으로 질주하는 교회 공동체나 성도 개개인은 역사의 중심을 관통하게 된다.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가 사람의 어떠한 지혜보다 지혜롭다. 

은금과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3:6). 지금 세상은 기독교의 숨통을 조이며 다양한 측면에서 광기를 드러내고 있다. 돈과 쾌락은 사랑하고 예수와 경건은 싫어한다. 바울의 예언처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교회에서 목격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하다. 목회자의 주머니는 은금으로 두툼하다. 동시에 교회의 빚은 산더미다. 모든 목회자와 교회가 그러지는 않지만 대체로 교회의 개척과 성장과 폐쇄의 희비가 돈에 의해 엇갈리고 있다. 설교자는 돈의 심기를 살피고 회중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설교는 극도로 자제한다. 회중은 웃기고 자빠지는 설교에 열광하고 설교자는 웃음과 번영의 처세술 조달에 민첩하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와 향기라는 존재감은 빈약하다. 사도들은 반대였다. 비록 은금은 그들의 주머니에 없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태생적인 앉은뱅이 된 사람도 세웠으며 무너진 교회의 존재감도 일으켰다. 이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지금도 세상에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불법과 무질서가 난무하고 있고 세상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앉은뱅이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 교회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쳐야 할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