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1일 일요일

낙원과 무덤에 계신 예수님

라면향기 그윽한 평화로운 밥상에 갑자기 신학적 의문들이 쏟아졌다. 첫째와 둘째와 셋째가 번갈아 손까지 들어가며 때를 기다린듯 발포한다.

첫째: 아빠, 교부들이 틀렸어요. 

아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아빠의 전공분야 딴지거는 게냐?

첫째: 성경에는 예수님이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함께 있겠다고 했는데, 사도신경 보면 지옥에 가셨다고 하잖아요. 사도신경 만드신 분들, 잘못된 거 아니에요?

아빠: 아하하하...그 문제 때문에 교부들을 건드린 거냐? 아들아,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가 필요한 거란다. 교부들이 토대를 닦은 교리이지. 그래서 사도신경 이해할 때에도 교부들이 가진 삼위일체 개념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너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단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 즉 성자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도 되신단다. 신성을 따라서는 그 강도가 죽으면 그 당일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번째 위격이신 성자와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이고, 인성을 따라서는 부활하기 전까지 지옥에 계셨다고 이해해야 하는거지. 사실 성경 안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옥가신 이야기를 했단다. 

첫째: 어떻게 그래요? 예수님이 둘로 나눠지신 거에요? 아니라면, 성경에도 모순이 있다는 거잖아요!

아빠: 예수님이 둘로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모순도 아니란다. 교부들을 비롯해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lius/aliud, totus/totum과 같은 구분들을 만들어 활용했다. alius와 totus는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고 aliud와 totum은 본성 즉 신성이나 인성을 가리키는 언어이지. 그러니까 Totus Christus는 모든 곳에 계시지만, Totum Christi는 모든 곳에 계시지 않는단다. 지옥에 가셨다는 말과 낙원에 계시다는 말이 모순처럼 들리지만, human nature 즉 totum을 따라서는 지옥에 계셨으나 성자로서 totus를 따라서는 모든 곳에 계시니까 낙원에 계셨다는 말이 맞지. 그러니 성경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사도들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란다. 

둘째: 아빠,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다고 하셨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계시지 않잖아요. 계셨으면 믿었을 건데...

셋째: 아빠 아빠,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다면 '라면' 속에도 계시나요? 

아빠, 첫째, 둘째: 푸하하하~~~~ 크흐흐흐....

아빠: 아그들아, 오늘 밥상이 너무 무거운걸....^^ 둘째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믿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란다. 계셔도 믿지 않는 게 가능하지. 그리고 딸아, 사도행전 보면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거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이 나온단다.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진 것에도 하나님은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거란다.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다는 말을 나무 젓가락 라면 계란과 같은 물리적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란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하늘과 땅에 가득하신 분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 갇히시지 않으시는 분이니까 참으로 신비롭게 모든 곳에 거하시는 분이란다. 사람의 이해대로 하나님이 모든 물리적인 공간에 계시다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마치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인 것처럼 거룩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경우가 세상에는 많이 있단다. 그걸 Pantheism이라고 그래. Pan 모든 것을, theism 신으로 믿는다는 의미다. 잘못되고 안타까운 일이지...사랑하는 딸, 라면 먹어도 하나님 먹는 거 아니니까 맛있게 먹어~~~~ 하하하.

내일 부활절이 되면 어떤 질문들이 쏟아질지 생각하니 움찔하다. 이거 미리 준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방만한 마음 가졌다간, 가장의 역할도 충실하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하는 점심이다. 그러나 뒷뜰을 덮은 수북한 햇살의 화려한 발광 덕분인지 밥상토론 분위기는 험하지도 어둡지도 아니했다. 

2013년 3월 30일 토요일

나눔의 예술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처럼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2)

믿음의 조상이 부르심을 받을 당시에 주어진 정체성은 복의 근원이다. 아주 특이하다. 복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줌으로써 취하는 자보다 더 큰 진정한 복을 누린다는 원리이다. 하지만 이 원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냉담하다. 모두가 보다 큰 복을 원하지만 주어야 한다는 복취득 방식은 껄끄럽다. 손실이나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러나 주는 자의 길을 선택하는 소수가 보인다. 참으로 귀하다. 하지만 좁고 협착하다. 역시 큰 복은 쉽게 주어지지 않나보다. 주는 자가 된다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어서 그렇다. 바울의 고린도 서신에서 주는 자의 비책을 입수했다.

핵심은 받는 자의 처지가 되라는 것이다.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과 무관한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되라는 것이 바울의 조언이다. 여기에는 부자가 되더라도 가난한 자와 구별하지 말고, 육중한 분량의 지식을 생각 주머니에 챙겼다고 해서 지적 빈곤자와 구별하지 말고, 권력의 고지에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제도권 밖 사람들과 구별하지 말고, 유력한 가문을 배경으로 가졌다 할지라도 고아 및 과부와 이질적인 신분인 것처럼 유세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유치한 구분으로 뿌듯한 쾌감에 젖는 졸부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주님은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처럼 되시었다. 방법과 내용이 동일하다. 주님 자신이 선물이 되시면서 수단도 되시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준다는 것은 사실 자신을 준다는 것이다. 쓰다가 남은 것을 후련하게 처분하듯 타인에게 소유권을 양도하는 것은 주는 것과 무관하다. 그러면서 낯뜨거운 생색은 있는대로 다 챙긴다. 주는 자가 됨이 없이는 주는 행위도 없다. 존재의 선행 없이는 행위도 없다. 주는 자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럴 위인이 아닌데도 그럴듯한 행위를 하면 그건 가식 내지는 위선이다. 타인과 스스로를 동시에 속이는 것이겠다. 주는 자란 늘 자신을 주는 자라는 의미이다.

약한 자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할 때 강한 자의 뻣뻣한 신분을 고수하면 받는 자는 거북하고 불편하다. 이게 불쾌한 쓰레기 처분인지, 민망한 동정인지, 가식적인 인기관리 방편인지, 아니면 교모한 댓가성 투자인지, 꺼림직한 의심이 사방으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선 나눔의 역기능 혹은 부작용은 받는 자도 불편하고 주는 자도 개운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동등한 관계성은 변질되고 공동체 내에는 신분의 벽이 올라가고 결국 사회는 묘한 위화감과 적대감에 휩싸인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그러하다. 이는 주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다. 보다 큰 복을 쉽게 챙기려는 안이함 때문이다.

주는 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첩경이며,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자가 된다는 것이며, 받는 자와 나란히 있는다는 것이며, 내가 아니라 받는 자의 양심을 따라 행하는 자이며, 주고 난 이후에도 내가 주었는지 누구에게 주었는지 무엇을 주었는지 계산하지 않고 주는 행위 자체를 생산하고 다른 일체의 대가를 구하지도 바라지도 아니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세상의 기부문화 평균치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교회의 현실은 어찌된 연고일까?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긴급한 숙제라 생각한다. 나눈과 섬김이 예술의 경지를 웃도는 실천의 뿌리가 교회에 편만하게 뻗어내릴 때까지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함께 각오해야 하겠다.

참으로 오랫동안 나는 받는 자의 자리가 익숙하다. 받는 자의 자리를 언제쯤 털고 일어나 주는 자의 우등한 복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을까나...

주님의 십자가

이번 고난주간,
보나벤처 붓으로 묘사된
주님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를 읽었다.

중세의 짙은 어두움은
그를 묵상의 끝모를 심연으로 내몰았을 게 분명하다.
원문을 파싱하고 문법을 운운하고
지식의 정확성 추구에 매달리는 것보다
몸과 영혼이 주님의 십자가에 뛰어드는
참여적인 묵상과 글쓰기가 보나벤처 글의 특징이다.

마리아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의 눈동자를 빌리지만
관찰의 목마름은 그들보다 더 갈급해 보인다.
성경 이야기의 행간에 박힌 섬세한 디테일을 읽어내되
특별히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마음에 감정을 이입한다.
십자가 처형의 전 과정에 전 영혼을 쏟아부어 동행했을
유일한 사람은 주님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어서다.

잔인한 채찍이 주님의 등짝을 할퀼 때마다
튀기는 핏방울과 고통스런 신음이 마리아를 엄습한다.
주님의 옷자락은 군병들의 거친 손에 찢겨지고
찢어진 조각은 재비뽑기 방식으로,
주님의 존재가 찢어지는 것이 신적인 진노의 결과인 양
사람에게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그 소유권이 흩어진다.

당국은 좌우에 강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간사한 연출 속에서
예수님을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는 군중심리 유발로
혹시 모를 민란의 희미한 조짐까지 꼼꼼하게 차단한다.
아들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어머니의 찢어지는 가슴과 눈물을 지켜보는 아들의 마음은
땅의 문맥에서 주어지는 가장 육중한 슬픔에 짓눌린다.

자신의 멈추게 할 수 없는 눈물과 북받치는 슬픔을
아들이 본다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스런 아들의 가슴에
보다 고통스런 슬픔의 예리한 못까지 박는
원인을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어머니는
슬픔으로 무너지는 마음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너무나도 복합적인 슬픔에 함몰된다.

그런데 그 슬픔은 '다 이뤘다'는 반전의 언설로 종결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본성적인 비참,
그러나 스스로는 그 심각성을 잘 모르는 비참의
잠재적 극치를 보여주되 바로 그 문제의 해법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비참의 궁극적인 회복이다.
걸러 읽어야 할 중세의 신학적 미숙도 드물게 만났지만
보나벤처 통해 나 자신의 본질상과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다.

이는 절기의 이벤트성 진리와 은혜가 아니기에
바울은 일평생 십자가만 알고 자랑할 것이라고 했나보다. 

2013년 3월 29일 금요일

죄책과 수치

일본에서 태어나 수십년간 아버지를 뒤이어 선교사로 섬기신 어떤 목사님과 베이커 서점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 오호호...폴, 오랜 만이다. 잘 지내고 있어?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네.

나: 네, 잘 지냅니다. 목사님도 잘 지내시죠? 전 가족들과 공짜영화 보러 왔습니다. 흐흐흐

목사님: 나도 가족들과 왔는데, 멀리서 사역하는 아들이 왔거든.

나: 오랜만에 상봉하신 거겠네요. 목사님은 요즘 어떻게 뭐 하며 지내세요?

목사님: 난 요즘 지나간 생의 의미있는 정리를 위해 붓을 들었지. 일본의 선교역사 정리하고 있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바라보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관점의 차이를 조명하고 조화를 시도하는 글을 구상하고 있단다.

나: 첫번째 기획은 정말 유의미할 것 같고, 두번째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젠대요? 복음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법이 많이 다른가요? 동양의 성장배경 가지신 서구인인 목사님께 딱 어울리는 주제네요? 하하하

목사님: 하하하 그런가. 동서의 차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죄책(guilt)과 수치(shame)의 차이라고 할까? 서구는 인간의 죄를 죄책과 늘 결부시켜. 서구 기독교의 궤적을 쭈욱 돌아보면 한번도 포기된 적이 없었던 전통적인 죄진술 방식이지. 그렇게 보면 신학에 법률적, 제도적 성격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어. 어떤 질서 속에서의 잘못을 인지하고 수습하는 법적인 문맥이 강조되면 나의 내면을 향하여 깊이 박힌 죄문제의 실체는 간과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그런데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동양은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에 민감한 문화적 신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나: 저도 역사신학 전공자로 역사의 먼지를 터는 방식으로 서구의 신학을 공부해 왔지만 서구의 신학은 주로 전자의 테마로 신학을 전개하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 혹은 수치의 개념은 조명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목사님: 맞아. 나도 서구의 신학이 외부의 어떤 질서에 위배되는 인간의 죄문제에 집중하고 정작 인간 자신의 내면으로 붉어진 죄의 영향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한 것을 느꼈단다. 성경은 안그런 것 같은데 말이야.

나: 정말 그러네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그들은 '중죄를 지었으니 이제 죽었다'는 생각보다 눈이 밝아져 서로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고 두려움이 이어졌고 수치를 수습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 같아요. 이러한 아담의 실패는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친히 벌거벗은 수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가려 주심으로 회복된 것이구요.

목사님: 폴, 바로 그거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으셨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셔야 마땅하신 분인데 모든 걸 스스로 훌훌 벗으시고 죄악의 두툼한 때에 쩌든 부끄러운 육신의 옷을 입으셨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단순히 법률적인 문맥 속에서의 사태수습 정도로 풀어가는 신학의 편향성이 문제란다. 물론 그런 접근법의 중요성을 존중해야 되겠지만 동양의 문화가 가진 수치에 대한 깊은 이해로 십자가의 문제를 조명하면, 음...폴 너의 설명처럼 수치의 문제는 성경을 관통하고 있기에 그 정도의 비중만큼 존중되지 않으면 안될 듯하구나.

나: 목사님, 그 책부터 쓰세요. 벌써부터 읽고싶어 지는걸요? 첫번째 독자가 되고싶을 정도로요...하하하...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할 기획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통해 성경의 그늘진 진리가 더욱 환하게 드러나면 좋겠어요.

목사님: 격려해 주니 고맙구나. 잘 될지는 모르겠다. 암튼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렴. 나중에 또 보자~~~

나: 네, 안녕히 가세요. 좋은 교훈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진로 이야기

아들은 앞으로의 진로가 궁금하다. 최근에는 법조인이 학교에 찾아와 '직업 설명회' 시간도 가졌단다. 자기는 범죄가 아니라 사회법 분야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동기가 궁금해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아빠: 아빠가 법을 공부했던 이유는 사도 야고보가 말한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 때문이지. 고아와 과부를 그 어려움 중에서 돌아보는 것 말이다. 그래서 수학을 접고 법조인의 길을 시도했던 거다.

아들: 그런 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서 잘 살게 해 주셨어도 되잖아요.

아빠: 물론 그렇게 해도 도움은 되겠지만 당장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서 억울함을 당하시는 분들에겐 법조인의 도움이 절박하지. 그런 다급한 필요에 부응하고 싶었단다. 결국 가장 궁극적인 가치와 필요를 생각하다 이렇게 신학의 길을 지금까지 걷게 된 것이지만.

아들: 법조인의 활동도 가치가 크잖아요.

아빠: 그래, 대단히 크고 중요하지. 사회의 기틀을 세우고 연약한 분들을 보호하는 일이니까. 사실 칼빈이나 루터도 법학을 공부했던 분들이다. 너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공부해라. 그런데 아빠는 특이한 습성이 있었단다.

아들: 그게 뭔대요?

아빠: 쉽게 정복되는 분야는 오래 머물지를 못한다는 거다. 조금만 노력하면 정복되는 분야는 싱겁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복'이란 무례한 단어를 머리에 떠올리는 것마저도 불경한 그런 매력을 가졌단다. 신비와 계시가 혼합되어 있으면서 결코 정복되지 않는 분야라는 사실에 진로의 코뚜레(%$!?)가 걸리고 말았지.

아들: 법도 계속해서 변하니까 정복되지 않는 거잖아요. 동성애법 논쟁도 그렇구요.

아빠: 변해도 결국 인간문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잖아. 거기서 거기거든. 엄밀하게 보면 새로운 게 아니란다. 변하는 상황에 따라 춤추는 재해석일 뿐이지.

아들: 아빠는 제가 학부에서 무엇을 공부하면 좋겠어요?

아빠: 역사와 철학. 역사는 넓고 철학은 깊어서다. 역사는 내용의 분량을 공급하고 철학은 생각의 방법론을 제공하지. 물론 관점은 성경에서 취해야 되겠지. 성경의 높이와 역사의 넓이와 철학의 깊이를 따라 꾸준히 길게 공부하면 좋겠구나. 혹시 알스테드 들어봤니?

아들: 누군대요?

아빠: 아빠가 공부했던 17세기 독일의 개혁주의 신학자야. 그런데 특이한 시도를 했던 분이란다. 모든 학문을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통합하려 했지. 이상하고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아빠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선배 케커만을 흉내내고 발전시킨 체계지만 보다 깔끔하게 통합하는 수학적 감각이 부족했지.

아들: 수학도 중요해요?

아빠: 옛날에는 산술이라 했다. Arithmetic. 사실 수학은 질서와 체계와 통합을 연습하는 사유의 학문이다.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수학을 다른 학문이나 개인의 삶이나 사회의 규칙이나 세상의 질서에 대입하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수학은 건물의 보이지 않는 기초나 뼈대와 같단다. 모든 학문의 상아탑이 수학적 골격 위에 세워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아빠 눈에는 알스테드 시스템의 그런 골격이 다소 약해 보였단다. 암튼, 아빠의 경험적 결론은 신학이 모든 학문의 퀸이라는 거다. 7세기 칼 대제가 궁중에서 3학4과 기초학문 교육을 시작한 것도 사실 그런 의도였지.

아들: 하하하...또 신학으로....!!!

아빠: 임마! 아빠가 유도하는 거 아니거등~~~! 아빠도 네가 아빠의 결론 어거지로 따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 너에게 가장 즐겁고, 그것을 하면 굶어도 좋을 정도로 만족하고, 일평생 매달려도 후회하지 않을 분야를 선택하길 바래. 물론 다른 분들에게 최고의 가치와 유익을 끼치는 그런 것을 택하는 건 기본이지. 아빠에겐 그게 신학! 그러나 너의 결론이 아니라면 너의 길은 아닌거다. 알았지?

아들: 네, 알았어요.

봄방학 첫날인데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나 보다...암튼 자식에게 부모의 기호를 강요하고 자녀들의 연장된 성취에서 재미 보려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녀들의 영적 지적 분별력을 키워 자율적인 판단을 따라 본인의 진로를 책임있게 걷도록 도와주는 부모이고 싶다.

2013년 3월 28일 목요일

도둑질 문제의 적극적인 해법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지 말고
돌이켜 자기 손으로 좋은 일 행함으로 수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하라 (엡4:28)

거짓말 문제는
거짓말을 내뱉지 않으면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정직한 말로 입술을
빼곡하게 채우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도둑질 문제를 푸는 열쇠도
도둑질의 소극적인 중지만이 아니다.
나아가 도벽에 중독되어 있던 손이
좋은 일로 눈코뜰새 없도록 분주해야 한다.

게다가 그런 수고의 목적에 있어서도
자신의 빈곤 해결하는 것을 넘어
타인의 가난까지 타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한 행실과 정신의 정립이 도둑질 문제의 열쇠이다.

이는 악을 선으로 이긴다는 원리의 구체적인 사례이다.
악의 문제는 악의 억류나 제거에서 풀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창궐하는 악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선이다.
악인의 관영은 의인의 관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의미의 결을 같이한다.
악을 피하는 방법은 여호와 경외에서 찾아진다.

도둑질 말라는 것은 부정적인 계명이다.
부정의 문제를 푸는 해법은 긍정이다.
부정의 부재는 더 심각한 부정의 준비일 뿐이다.
처음보다 더 심각한 부정의 시작이란 얘기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있다면
문제의 해결은 귀신을 내쫓는 귀신의 부재가 아니다.
그 귀신보다 더 악한 일곱의 귀신이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된 그 사람에게 돌아와
그의 나중 형편이 훨씬 더 심해졌다.

원수의 문제도 그 원수의 제거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일곱의 원수가 등장해 사태는 훨 악화된다.
원수문제 푸는 예수님의 비법은 잘 알듯이
그를 사랑하고 기도하며 축복하는 것이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다. 세상의 은밀한 질서다.
부정을 긍정으로 푼다는 원리, 우리의 적극적인 삶을 요청한다.

2013년 3월 27일 수요일

성경의 필요성

자녀와 대화할 시간이 빠듯하니 기회만 되면 학습에 들어간다. 오늘도 등교길 차 안에서 학습 유도용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아빠: 아들아, 성경은 왜 필요한 거냐?

아들: 글쎄요~~? 음~~ 말은 없어지고 바뀌니까 그렇지 않으려면 성경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빠: 그렇지. 사람은 자신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바뀌는데, 이는 자기가 머문 시대와 문화가 변해도 알아채지 못해서지. 말도 그렇단다. 활자로 박아두면 변질되지 않고 훨씬 오래가지. 성경의 또 다른 필요성은 없니?

아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 전하기에 좋은 것 같아요. 급하면 다 보여주고 말해주지 못하니까 성경을 주고 오면 되잖아요.

아빠: 오호호, 그런 필요성은 나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거네. 맞다. 성경은 복음증거 필요에 부응하지. 복음 증거자가 혹 못났거나 잘못 전해도 사람 때문에 복음이 왜곡되고 거절되는 건 방지할 수 있겠네. 그런데 선지자나 사도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도 그러시면 안되냐? 왜 우리는 성경이야? 읽는 것도 힘들고 이해도 어렵잖아. 안그래?

아들: 아빠~~~ 보여주고 들려주면 너무 쉽잖아요. 제가 영화를 보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보거든요. 그런데 책은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읽어요. 주님께서 좋은 걸 주시려고 그러시는 걸꺼에요.

아빠: 오랜만에 괜찮은 소리를 했네...흐흐흐, 흐뭇하다. 수학에도 풀리는 것보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95%가 넘는단다. 인생도 동일하지. 헛갈리고 모순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단다. 보이고 들리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 예수님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판단하는 분이 아니라고 했다. 땅에 있는 것도 그러한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천국은 어떨까? 쉬운 게 능사는 아니란다.

아들: 히힛, 오늘은 우리 싸우지 않았네요?

아빠: 이 녀석! 넌 아직 아빠와 싸울 감이 아니쥐~~~ ㅋㅋ 좀더 크면 상대해 주마~~~ God be with you today!

아들: Bye, I love you~~~

뻘콥이나 바빙크의 체계적인 성경론을 고스란히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렸다. 인격적인 대화에 딱딱한 체계를 들이대는 건 어울리지 않아서다. 그냥 일상 속에서 그때그때 최적의 진리 조각들을 심는 방식이 유용한 것 같다. 

생각을 사랑하라

타인의 생각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것,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배움의 방편이란 차원에서 
그런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야 할 종착지는 아니다.

물론 세상을 다 털어도 
전대미문 수준의 새로운 사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상을 생산하여 
언어의 옷을 입히는 창조적인 일은 
전인격적 수고의 땀을 흠뻑 쏟어야 가능하다.  

생각의 세계는 신비롭다. 깊이가 무저갱에 가깝다. 
지금까지 그 바닥을 친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사람의 마음에 있는 도모는 깊은 물과 같으나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러 낸다고 했다.

자신을 숨이 막히도록 경이롭게 만드셨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경이로운 일을 
자신의 영혼이 잘 알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란 이유를 추가한다.
생각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일에 호응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사랑을 사랑해야 한다는 어거스틴 표현을 살짝 수정하여
생각을 생각하고 생각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은 언어와 학력과 신분과 재력과 출신에 좌우되지 않는다.
생각이 한 발짝만 더 깊으면 타인을 섬기는 자가 된다.

생각을 하루에 한 가지만 생산하는 훈련에 돌입하여 지속하면
1년이 못되어 생각에 근육이 오르고 사유의 달인으로 등극한다. 
타인의 생각을 익히고 자기 방식으로 수정하는 작업도 필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사유의 자율성이 구현되는
단순한 재생산 너머의 자리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사유가 따라야 할 절대적인 원리이며
땅의 한계를 뚫고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종점이요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야 할 최종적인 안식처다. 
성경과 더불어, 성경 안에서, 성경을 따라서
생각하는 성도라야 교회에 난관이 극복되고 소망이 주입된다.

2013년 3월 26일 화요일

쟝 보딩의 [국가론] 출판

정치사상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퀜틴 스키너가 '16세기에 저술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영향력이 컸던 정치철학 문헌이란 주장이 가능하다' 평가한 쟝 보딩의 [국가론 (아카넷: 2013)] 완역본이 가판대에 올라 애서가의 구미를 애달구고 있다. 바돌로뮤 대학살 사건이 집필의 영감을 일으켰고 보딩은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공화국 옹호자의 일성을 내질렀다. 그의 중립성은 다양한 종교의 조화로운 공존을 주장함에 있어서도 그 빛을 발하였다. 명목상 로마 카톨릭의 일원으로 머물러 있었으나 교황권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웠던 인물이다. 동양에서 최초로 완역판이 나온 정치사상 분야의 고전인 만큼 고전 프랑스어 원본(초판은 1576, 1606년에 재판됨)과 라틴어 역본(1586)도 필요할지 몰라 링크걸어 둔다. 1606년에는 영역본도 나왔으니 참조하면 되시겠다.

Jean Bodin, Les Six livres de la Republique (Par Gabriel Cartier, 1606)
Jean Bodin, Andegavensis De republica libri sex (Paris, 1586) 

진리의 유통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authorem eius esse Deum)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확신하기 전까지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의 최종적인 증명은 언제나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인격에서(a Dei loquentis persona) 얻어진다.

우리가 양심에 최고의 자문(conscientiis optime consultum)을 원한다면, 의심으로 인해 흔들려 배회도 요동도 않고 극미한 의심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런 설득은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혹은 짐작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내적인 입증(interiori spiritus sancti testificatione)에 의존해야 한다.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인치기 전까지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말씀에 대한 신앙은 발견되지 않는다(etiam non ante fidem reperiet sermo in hominum cordibus quam interiore Spiritus testimonio obsignetur)

칼빈의 생각이다. 진리의 신앙이 세워지는 토대가 하나님의 성경 저자성과 성령의 내적 증거라는 이야기다. 사람의 토론과 천재성과 보편성이 보증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전적인 은혜이다. 진리의 전달에서 유통마진 챙기려는 삯꾼들이 많다. 명예든 권력이든 물질이든 거래의 대상으로 진리를 폄하하지 말아야 하겠다. 

신학적 논의의 그릇된 태도들

신학적(특별히 삼위일체) 논의에 있어서 히포의 주교가 째려본 논객들

1) 믿음으로 신학적 논의를 시작하는 것을 경멸하는 이들
(fidei contemnentes initium)
2) 이성에 대한 미숙하고 도착적인 사랑에 현혹된 이들
(immaturo et perverso rationis amore falluntur)
3) 신체적인 지각의 경험을 통해서든, 인간의 타고난 요령과 끈덕진 탐구 혹은 과학의 도움을 통해서든, 물질적인 것들에서 터득한 것들을 비물질적 영적 존재에 투사하여 전자로 후자를 가늠하고 해명하려 하는 이들
(ea quae de corporalibus rebus sive per sensus corporeos experta notaverunt, sive quae natura humani ingenii et diligentiae vivacitate vel artis adiutorio perceperunt, ad res incorporeas et spiritales transferre conantur ut ex his illas metiri atque opinari velint)

이들은 자신들의 선입견을 표명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이해를 가로막고 그릇된 견해라 할지라도 끝까지 고집하며 한번 옹호했던 것들은 변경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라 했다. 아마도 어거스틴이 오늘날의 학풍 속에서 학자활동 했다면 머리둘 곳이 없었을 것으로 사려된다. 여튼 학자연한 길을 인생의 대로로 설정한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지적임에 분명하다. 가슴이 뜨끔하다.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어거스틴 할배의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어거스틴 언술은 언제나 깊은 사유를 자극한다.

하나님은 질적인 속성의 제한이 없으신 선이시며
(sine qualitate bonum)
분량으로 가늠되지 않으시는 웅대한 분이시며
(sine quantitate magnum)
결핍이 없으신 창조자가 되시며
(sine indigentia creatorem)
처소가 없이 거하시는 분이시며
(sine situ praesentem)
만물을 조건 없이 유지하는 분이시며
(sine habitu omnia continentem)
공간에 제한됨이 없이 도처에 편재하는 분이시며
(sine loco ubique totum)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 영원한 분이시며
(sine tempore sempiternum)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시되 변동될 것들을 만드는 분이시며
(sine ulla sui mutatione mutabilia facientem)
당하시는 수동성이 없으신 분이시다
(nihilque patientem).

이는 어거스틴 할배가,
비록 자신의 지성조차 이해하지 못하여
감히 자신의 본성과 지성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 파악은
시도조차 엄두도 못낼 것이지만
최소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는 위험성은
방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내뱉은 고백이다.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진리의 증거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 (요5:39)

요한을 여인의 몸에서 난 최고의 인물이라 한 것은 예수님의 평가였다. 그는 진실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마지막 주자였기 때문에, 그의 입술에는 모든 선지자의 예언자적 무게가 실렸었다. 그런데 주님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며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않겠단다. 그리고서 하시는 말씀이 성부께서 친히 자신을 위하여 증거하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증거하며 성경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증거할 것이라고 한다. 진리는 사람에게 맡겨지지 않았고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스스로 증거한다. 성경도 스스로 증거한다. 신학적 용어로는 계시의 자증성 되시겠다. 천재의 통찰력이 진리의 엄밀성을 보증하지 못하고 인간의 보편성이 진리의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다며 서운해 할 것 없다. 오히려 진리의 증거가 사람에게 맡겨지지 않았고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은혜와 영광과 감사의 원천이다.

칼빈은 세상에서 가장 지고한 지혜의 총화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cognitio Dei et nostri)이라 하였다. 이런 이중적인 지혜의 맥락에서 그의 교의학은 창조주 및 구속주가 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de cognitione Dei creatoris et redemptoris)과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로 말미암아(arcana operatione Spiritus)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인지하고 누리는 방식(De modo percipiendae Christi gratiae) 및 진리를 증거하여 당신의 백성을 모으시는 외적인 수단(De mediis)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가 증거되고 그의 백성들이 초대되는 외적인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를 아는 지식의 핵심이다.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행하신 일들과 성경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친히 증거한다. 그럼 우리는 뭐냐? 진리를 배우고 익히고 살아서 증거하는 외적인 수단으로 영광의 부르심을 받은 그의 증인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라 한 엘리바스 진술이 아프게 꼬집은 것처럼, 우리가 의로운들 전능하신 분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행위가 온전한들 그분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본질과 영광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첨삭되는 일이 결단코 없다는 예기겠다.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거기에 가감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의 진리와 나라가 연약하디 연약한 우리에 의해 마치 죄우될 것 같은 명령문이 때때로 주어지는 것은 그 자체가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은혜와 영광인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진리를 가르치고 살아내게 하라는 명령을 주면서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인이 되어질 것이라는 은혜의 주도성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그의 나라를 확장하는 대단한 사명의 수행자로 비장하게 헌신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비천하고 연약하고 없는 자들인데 진리와 관계된 최고의 영광스런 일에 은혜의 부르심을 받아 참여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은 은혜이며 영광이다. 그 일에 외적인 수단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돕는 일에 쓰인다면 그 자체가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는 영광이요 달려갈 길을 끝마친 이후에는 무익한 종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는 고백으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밖에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우리의 존재감은 거기에 있다. 모든 귀하고 선하고 올바른 것들의 원천이며 최고의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영광스런 일인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생은 뒤틀린 열심과 조악한 불평과 추루한 자랑과 뻣뻣한 거만과 부당한 생색으로 첨철될지 모른다. 주님은 사람에게 증거를 구하지 않으신다. 그게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셨다. 이미 기본을 초과했다. 이는 어떠한 생이 우리에게 펼쳐져도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은혜요 영광이며 감사가 마땅한 이유겠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그리고 살아 있다. 

2013년 3월 23일 토요일

하나님의 은혜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15:10)

많은 분들이 구원은 홍해를 건너는 것이고 성화는 요단강을 도하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홍해는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갈라졌고 요단강은 그 이후에 갈라졌기 때문에 전자는 전적인 은혜이고 후자는 우리의 주도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해석도 당당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부유한다. 그렇게 생각해도 될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조심해야 할 암초들도 눈에 걸린다. 즉 구원과 성화의 단절적인 구분도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며, 그런 구분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를 '구원'과만 결부시켜 다른 부분들은 마치 인간의 주도권이 마음껏 발휘되는 영역인 것처럼 여겨 하나님의 주권을 배제하는 듯한 태도는 심히 경계해야 할 오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는 소위 '황금의 사슬(catena aurea, golden chain)'이라 알려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작정하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구속사적 역사전개 방식의 총화 말이다. 여기서는 구원이 칭의만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의 서정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칭의까지 구원이라 말하고 나머지는 구원과 무관한 것처럼 구분하지 않았으며, 그 '구원' 이후의 내용들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맡겨진 것처럼도 묘사하지 않았다. 케커만이 신학의 목적을 '구원 그 자체(ipsa salus)'라고 규정했을 때 그는 로마서 8장에 소개된 구원의 서정 전체를 의미했던 것이다.

구원의 절대적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고, 구원의 의미가 로마서의 전포괄적 서정 전체라고 한다면, 성화가 우리의 노력에 달렸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작정에서 영화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역이고 공로이고 은혜이다. 내게 있는 것들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없으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고백은 이러한 은혜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의 실력을 발휘할 무대가 사라졌다 낙망하는 분들은 이런 은혜론이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박탈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아무것도 안하는 무사안일 종교로 만든다고 염려할지 모르겠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이다. 기독교는 내가 주체가 되어 모든 에너지를 불태우는 격정적인 헌신의 종교가 아니다. 내가 뭘 하지 않으면 무너질지 모르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의 창조부터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행하셔서 그 은혜에 감격하고 반응하는 삶이 펼쳐지는 종교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보다 괜찮은 상급을 취득하는 그런 차원의 열심이 고개도 내밀지 못하는 게 기독교다. 그럼 우리는 뭐냐고 따질법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하지만 출중한 석학들도 모르고 세상의 최고 제왕들도 못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행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라는 사실에 장악된 사람들은 뭘 연구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때까지 추구하고 뭘 행하여도 하나님 자신이 동기요 능력이요 목적이 되신다는 신적인 규모를 따라 질적으로 다른 열심을 발산한다.

은혜가 결코 나태를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적인 규모의 열심이 촉발되는 근원이다. 은혜가 없는 분들의 열심은 감동과 도전이 아니라 민망과 부담이다. 일 저지를지 모른다는 긴장과 염려만 부추긴다. 개인의 삶에도, 교회에도 등장하지 말아야 할 열심이다. 땅에서 없어지는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시간과 재능과 지식과 재력과 체력과 성품이 닳도록 열심으로 살아간 거인들의 배후에는 여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사도였다. 진실로 그는 '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도 죽을 정도로 수없이 맞았고 잠도 못잤으며 주렸으며 목마르며 헐벗었고 사방이 위험들로 우겨쌈을 당하는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게 기독교의 열심이다.

히포의 주교(Augustinus)는 '우리에게 있는 것들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대한 주석으로 "우리는 어떠한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것에서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in nullo gloriandum est, quando nostrum nihil est)는 키프리안 글귀에 감동을 받아 우리의 믿음은 물론이고 가장 지속적인 순종(obedientia perseverantissima)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록은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고백의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히포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맹렬한 공격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진리와 씨름하고 저술하는 열심이 멈출 줄 몰랐던 주교였다. 열심에도 종류가 있다.

이러한 선배들의 경건한 열심이 나의 나됨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는 지점에서 내게서도 시작되면 좋겠다.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사랑을 사랑하라

우리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만약 사랑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단어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고
그 단어 자체도 가리키고 있지만,
단어가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 자체를 지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단어는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이 되듯이,
사랑도 진실로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나
사랑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자신을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셈이기 때문이다.

Augustinus, De trinitate, VIII.viii.12.

설겆이 시간 활용법

설겆이 시간 활용법

가뭄에 콩나듯 아~~주 드물게 설겆이에 나서지만 투입되는 시간이 적잖아 요령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나름 터득한 '비법'을 공개한다. 더 효율적인 요령 훈수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걸 남편들의 생존법 혹은 노후대책~~~~이라하면 서글픈가? 사실 이런 투자 개념이 설겆이에 개입되면 순수성이 떨어져 아래에 소개되는 비법의 효력이 반감된다. 기냥 '사랑의 하모니를 이루는 행위'라고 카자...ㅎㅎㅎ

1. 강의나 설교듣기: 식기류를 세제로 씻을 때에는 소리가 그리 요란하지 않아 청취가 가능하다. 그러나 물로 행구는 시간에는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설교에 끼어들어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묵상하는 게 상책이다. 하여 30분짜리의 설교나 강의가 적합하다. 청취가 끝나면 행구는 타이밍이 되도록.

2. 기도하기: 설겆이에 종사하는 어머니들, 애처가나 공처가 남편들을 위해 기도한다. 가정을 사랑과 진리로 잘 세워갈 수 있도록. 동병상련 때문에 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그들을 내 몸처럼 여기는 절박한 기도가 가능하다. 설겆이 소음이 유난히 심하거나 아이들의 소리가 마구 난립하는 상황에서 설교 들으면 신경질과 짜증만 가중된다. 이런 상황에선 기도가 최적이다. 평소에 기도하지 못했던 분들을 사랑으로 축복하며 기도하는 밀린 숙제 시간으로 활용해도 좋겠다.

3. 말씀묵상: 설겆이에 돌입하기 전에 난해한 성경 한 구절을 암송한다. 그것을 설겆이 내내 곱씹는다. 한 구절의 말씀을 이렇게 집중해서 길게 묵상하는 일 드물다. 하나 건지면 시간이 안아깝다. 신학적인 주제 하나를 깊이 사유하는 시간으로 삼아도 유익하다. 경험에 의하면, 대체로 신학적 사유가 끝나기도 전에 설겆이가 끝나더라.

4. 운동하기: 설겆이 자체에만 몰입하면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뻗뻗하고 뒷목도 땅긴다. 하여 목돌리기, 상체의 진동이 심하지 않는 가벼운 걷기, 간간이 허리 재끼고 수구리기 순으로 번갈아 운동하면 물리적인 설겆이 후유증도 없어지고 식후의 적당한 운동이라 소화에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5. 끝마무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맨손으로 설겆이를 하여 피부가 세제에 장시간 노출된다. 설겆이를 끝마치고 반드시 손비누로 깨끗하게 씻되 손끝이 잘 미치지 않는 부위를 꼼꼼하게 문질러 피부에 박힌 세제를 말끔하게 제거해야 한다. 이때 손톱에 묻거나 낀 세제를 간과하지 않도록. 그리고 세제제거 이후에 반드시 로션으로 보습해 주면 주부습진, 피부노화, 잔주름도 방지할 수 있다.

6. 기대효과: 1) 설겆이 떠밀기 문제로 발생하는 부부간의 갈등 때문에 소진하는 에너지, 무진장 절약된다. 2) 가정을 화목과 사랑과 평화로 바꾸는데 혁혁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3) 말씀과 신학과 기도와 건강이 제고되니 불가피한 노동의 시간이 행복으로 채워진다. 4) 설겆이 기피증도 없어진다. 5) 부모의 가사 나누는 모습이 무지불식 간에 노출되어 무의식 중의 관찰로 인한 자녀들의 학습효과 만점이다.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2차전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나누다가 신학적 삼천포로 빠졌다.

아빠: 아빠와 엄마의 속을 썩여서도 안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된다.

아들: 근데 아빠, 하나님도 감정(emotion)을 가지고 계세요?

아빠: 성경에는 하나님의 기쁨과 슬픔과 후회와 한탄이 표현되어 있지. 왜?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시면 안되냐?

아들: 감정은 약하다는 뜻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아빠: 감정을 약함과 연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니?

아들: 감정은 변화가 일어나면 전능하신 분이 다른 것에 영향을 받아서 변한다는 거잖아요. 그게 이상해요.

아빠: 아들아, 성경에 하나님의 감정이 표현된 것은 우리에게 적응하신 것이란다. 우리가 가진 변덕스런 감정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서는 아니되지. 계시적인 성격이 있거든.

아들: 아빠가 좋아하는 '본질'은 같지 않아요?

아빠: 사람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나고 놀라고 웃는 건 대체로 기대하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정보에 대한 반응인 경우가 태반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데 슬픔이 감정을 급하게 장악하고 웃음이 터지거나 분노에 휩싸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 인간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지식의 범위 안에서 그런 감정의 변화를 보인단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이 능하셔서 모든 것을 그 뜻대로 다 이루시는 분인데 그분을 화들짝 놀라게 하거나 무거운 슬픔이나 갑작스런 폭소를 촉발하는 원인이 따로 있을 수 있겠니? 주님께서 계시 차원에서 우리에게 감정의 기복을 보이시는 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은혜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은 아빠가 이겼냐?

아들: 재밋어요. 아빠는 승부에 연연했고 저는 즐겼으니, 제가 이긴 거 아니에요? 하하하

아빠: 하하하 그래, 임마...다 왔다. 오늘도 기뻐해라! Enjoy your day~~~

아들: 바이 대~~드. 

사람의 영광을 경계하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다 (요12:43)

이는 신앙을 가졌으나 출교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공적으로 주라 고백하지 못하는 소심한 혹은 비겁한 관원들 이야기다. 그런데 읽으면서 움찔했다. 나도 그런 관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거북한 느낌 때문이다. 단순히 느낌의 예민함 때문이 아니라 양심조차 거부의 손사래를 치지 못해서다. 물론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양태는 관원들과 다를 것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언급된 관원들과 나 자신이 전혀 다르지가 않다. 생각과 행실이 사람의 영광에 의해 조정되고 그것에 헐떡이는 삐뚤어진 기질을 가졌는데 표출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의 영광이 가진 중독성과 해악성에 단호히 대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아마도 최상의 해법은 하나님의 영광에 중독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영광(독사)'의 의미는 좋은 평판, 칭찬, 명예, 존경 등이겠다. 문제는 사람의 그런 영광이 마치 마약처럼 우리의 삶을 한번 건드리면 우리 스스로가 그것에 의한 자율적인 결박을 택한다는 것이다. 대중의 박수갈채 맛을 즐기면서 중독되어 해어나지 못하는 유명인의 이름을 굳이 거명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겠다.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하루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삶의 근육이 마비되고 명분과 의미가 실종되는 현상들은 낯설지가 않다. 어쩌면 이러한 증세가 교회에 가장 심각하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특별히 설교자의 자리가 위태롭다. 처음에는 은혜로운 말씀을 증거하여 성도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소망을 심어주는 진리로 안내하는 기쁨에 취하다가 나중에는 설교가 하나님의 기쁨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영광을 취득하는 방편으로 추락하는 막장이 쉬 펼쳐지기 때문이다. 

글쓰는 작가들도, 가르치는 선생들도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진리를 기술하고 가르치는 것과 사람들의 심성을 자극하여 영광을 끌어내는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 그런 모호함이 은밀한 거래를 조장한다. 맛깔스런 글과 교훈을 생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퍼뜨리는 수단인지 사람들의 칭찬을 낚으려는 떡밥인지, 하나님과 본인은 구분한다. 그러나 타인은 그런 은밀한 동기를 모르기에 대부분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방하고 속으로는 사람의 영광을 은밀하게 챙긴다. 여기에 자신의 양심이 민감하게 반응하면 자기최면 내지는 망각으로 대응한다. 이는 타인에게 발각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양심조차 거리낌이 없어지는 일거양득 신공이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내 안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본문을 읽다가 움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기도 하고. 

나는 앞으로 설교하고 글쓰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더 오싹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 사이의 택일 문제는 일평생 우리의 삶과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격정적인 화두임에 분명하다.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기 전에 그런 선택의 본질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사람의 영광에 쉬 빠지지 않도록 적당한 무신경도 준비하고 그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영광에 중독되는 경우를 위한 자기만의 비상용 해독제도 구비해 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구차한 부산을 떨지 않아도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생의 제일가는 목적에 전적으로 중독되어 헤어나올 수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나. 그러나 그런 야무진 꿈은 일찌감치 접으련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니까. 

오히려 복음을 증거한 이후에 버림이 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까지 쳐서 복종시킨 바울의 비법에 눈길이 끌린다. 동시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으나 이스라엘 백성과 장로들 앞에서의 채면은 구겨지지 않도록 사무엘로 동행해 달라고 구걸하는 사울의 서글픈 모습도 연상된다. 사울의 비참한 종말을 반면교사 삼고 바울의 고단한 길 택하는 것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2013년 3월 19일 화요일

용서의 위대함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3:13-14)

용서는 죽음의 연습이다.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상대방의 모난 성품과 뾰족한 독설을 용납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죽기보다 어려운 게 용서인지 모르겠다. 죽어서도 한이 해소되지 않아 그걸 후손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있어서다. 심지어 믿음의 용장 다윗도 이런 원한의 찌질한 되물림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요압으로 하여금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나 시무이가 과거에 자기에게 행한 일을 무죄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을 다윗은 그 중요한 유언장의 절반이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곧 왕위를 계승하게 될 아들에게 건내주는 꼼꼼함을 보였을 정도다. 다윗의 못난 구석을 들추자는 게 아니다.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용서는 우리 스스로의 실력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은혜가 필요하다. 그 은혜의 핵심은 주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이다. 용서의 가능성과 실현성은 거기서만 찾아진다.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에 뿌리를 두지 않은 용서는 불안하다. 무늬뿐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사람들은 분과 노를 그런대로 많이 다스리면 그게 용서인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신 용서는 차원이 달랐다. 용서하면 독생자의 생명까지 포기해야 하는 극한적인 '피해'가 수반되는 용서였다. 그리고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였다. 이번만은 지나가 주겠으나 반복되면 국물도 없다며 응징의 주먹을 보여주는 일회용 용서가 아니었다.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완전한 용서였다.

본문은 온전한 용서가 용서 자체로만 구성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역설한다. 온전한 용서의 깔끔한 마무리는 역시 사랑이다. 사랑의 띠로 온전하게 매지 않으면 용서는 일종의 보복으로 전락한다. 용서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하겠는데 다시는 보지 말자'는 격이겠다. 이건 보복이다. 분노를 삭이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용서는 사랑까지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그러했다. 죄에서 건져내신 이후에 우리를 안면몰수 하시지 않으셨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떠나시지 않고 영원히 동거해 주신단다. 피조된 시공간의 어떠한 것도 단절할 수 없도록 우리와 당신을 사랑의 온전한 띠로 묶으셨다. 이 사랑은 아무도 변경하지 못하도록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다. 보증으로 성령까지 보내셨다. 용서는 이런 꼼꼼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랑으로 완성된 용서의 표본은 성경의 시작부터 등장한다. 요셉 이야기가 그렇다. 창세기의 결론은 요셉의 용서 이야기로 끝맺는다. 요셉의 용서는 가장 가까운 일촌의 잊혀질 수 없도록 가장 쓰라린 배신을 용서하되 가해자의 삶과 그 자손들의 삶까지 보장하고 책임지는 위대한 사랑을 더한 용서였다. 손양원 목사님도 사랑의 지문이 가장 짙게 묻었을 장남과 차남을 살해한 가해자를 용서하되 그를 양자로 삼는 사랑으로 온전한 용서의 마침표를 찍으셨다. 고개가 숙여진다. 용서의 위대함이 밀려온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나의 연약한 존재를 압도하는 용서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사건이 없었다. 오히려 늘 타인에게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세월을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고작 말씀에 묻혀 용서의 비밀을 관객의 자리에서 은미하고 있을 뿐이다.

용서의 저울질이 삶을 노크할 때 쌍수로 환영할 준비는 미리미리 해 두어야 하겠다.

신학논쟁

부자간의 신학논쟁

아들: 아빠, 하나님은 왜 세상을 이렇게 지었어요?

아빠: 어때서?

아들: 힘들고 어렵고 죄도 많잖아요.

아빠: 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 있는거냐?

아들: 죄가 없었으면 보시기에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아빠: 죄와 연결된 자유를 생각해 보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우리를 로보트에 준한 사람으로 만드시면 더 좋은 세상이 되었을 것 같애?

아들: 왜 아빠는 죄를 지을 수 있어야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빠: 자유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거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되 우리로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길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단다.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고 싫어하고 미워할 그런 가능성의 자유까지 주셨지. 죄라는 결과에만 생각이 묶여서는 안된단다. 그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가치가 죄까지 허용될 정도로 크다는 것에 감사하는 게 더 올바르다.

아들: 아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산다면 거기서는 죄가 없어요?

아빠: 그럼, 죄와 눈물과 고통이 없는 곳이지.

아들: 그럼, 죄 지을 가능성도 없어요?

아빠: 천국의 상태를 죄 지을 수 없는(non posse peccare) 영화의 상태라고 말한단다.

아들: 그럼, 지금 이 세상보다 자유롭지 못한 곳이네요.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 덜 좋은 곳 아니에요 아빠?

아빠: ....ㅡ.ㅡ....아들! 한판승, 인정한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리라 (잠16:7)

바울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고 자문하며 후자를 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이분법적 논법을 구사했다. 그가 일생을 건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이유도 빠뜨리지 않았다. 사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하다. 윈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좋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이란 초보적 지혜를 바울이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바울은 언제나 타인의 양심을 존중했고 형제를 위해서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까지 끊어진다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도였다. 

본문에는 구체적인 원수사랑 윈윈법이 소개된다. 원수는 개인적인 관계성도 문제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누구를 위해야 하는지의 택일이 요청되는 상황을 상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적인 택일이지 결과적인 택일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의 인과를 제시한다. 한 사람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다른 사람과도 나아가 그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원인이고 원수와의 화목은 결과라는 인과에서 우리는 인(cause)과 과(effect)를 이어주는 논리의 끈이 궁금하다. 하나님의 기쁨이 원수와의 화목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과정과 순차적인 단계가 생략되어 있어서 본문을 둘러싼 문맥에 탐구의 시선을 투하할 수밖에 없다.

첫째,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도 여호와는 보다 깊고 근원적인 것을 감찰하는 분이라는 점이 지적된다. 모든 것을 동시에 보시되 모든 시간까지 영원한 현재로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과 찰나적인 부분만 보고 자신의 주관적인 기호에 근거해서 늘 판단하는 우리의 안목이 다르다는 건 천지의 무한한 격차로도 설명되지 않음을 이사야가 잘 말하였다. 둘째, 하나님이 온갖 것들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고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만물의 조화로운 질서와 시간의 절묘한 타이밍과 존재의 개별적인 보존이 모두 신적인 섭리의 손아귀에 있어서다. 하나님의 기쁨이란 늘 온 세상과 전 역사가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은 시간과 공간 전체가 최상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셋째, 여호와를 경외하면 악에서 떠나게 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경외심이 원수에게 노출되는 것은 그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성의 막장으로 치닿는 것과는 정반대로 원수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게 하는 영향력을 발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으로 귀결된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의 제안을 등지고 여호와 경외를 고수했을 때의 일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원수와의 화목은 그의 비위에 순응하는 원수 중심적인 태도로는 얻어질 수 없다. 처음에는 다시스로 가는 순풍을 만나는 듯하여도 결국은 자신와 원수 모두가 사망의 길로 접어든다. 눈에 걸리는 가까운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께 반응하는 자로 머무는 자기와의 싸움이 화목의 관권이다. 자신과 원수를 살리는 비법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행실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 자신이 상급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실 것이라는 거다.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는 원수라도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결과도 덤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과 원수와의 화목과 믿음의 내용을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하는 해석학, 성경 한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편들어 줄 근거들을 닥치는 대로 동원하는 이런 식의 접근법이 다소 비약적인 뚱딴지 어법으로 느껴져 거북할 수 있겠으나 계시의 본질과 성경의 속성과 인간의 언어를 조금만 깊이 숙려해 보면 학문적인 타매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하나님이 성경의 주어라는 사실을 최대한 존중하는 해석학이 나는 좋다.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연민에 휘둘리는 판단은 함께 제대로 망하는 첩경이다. 개인도 그러하고 가정의 경우도 동일하다. 인생이 결정의 연속이라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판단력은 평생을 좌우하는 열쇠라고 해도 무방하다. 범사에 믿음으로 그분의 계심을 인정하고 그분만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여기며 만족하는 판단력에 어떠한 좌우로의 치우침도 없어야 하겠다. 그러면 외관상의 멸망과 좌절도 즐겁고 유쾌하다. 잠깐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인데,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주를 기뻐하며 유쾌하게 살자. 그러면 철천지 원수들도 화목의 울타리로 들어온다. 그건 인생의 덤이다. 

2013년 3월 18일 월요일

Bibliotheca chalcographica

친구 Todd Rester 블로그에 오른 사이트다. 만하임 대학이 또 유쾌한 일 저질렀다. 쟝 자크 부와사르(Jean Jacques Boissard, 1528-1602)와 데오도르 드 브리(Theodor de Bry, 1528-1598)가 편집한 [동판화 백과(Bibliotheca chalcographica, hoc est virtute et eruditione clarorum virorum imagos, Heidelberg, 1597-1669)]를 디지털로 만들었다. 16-17세기를 살았던 덕과 박식을 겸비한 위인들의 초상화가 무려 438점이 포함되어 있다. 간간이 13-15세기 인물들의 이름도 눈에 걸린다. 베자의 Icones (1580)와 비교해 보니 초상화의 수효는 물론이고 초상화에 담긴 각 인물들의 모습도 보다 멋지고 웅장하다. 물론 최고의 초상화 사이트는 20만점을 훨씬 상회하는 디지털 초상화 인덱스(Digitaler Portrait Index)다. 각 초상화에 저작권이 있는지의 여부는 사용자의 몫이다. 이렇게 떠넘기는 이유는 그거 일일이 확인하다 머리가 파뿌리로 변할지도 몰라서다. 

2013년 3월 17일 일요일

원수사랑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히10:30)

예수님은 원수보복 금지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라 하시었다. 원수는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되어 어떤 식으로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그걸 180도 뒤집으신 예수님의 발언을 접하면 뾰족한 반감을 넘어 교제의 격한 단절까지 생각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심사겠다. 사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준의 평형적 보복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보복심 자체를 금하시고 나아가 '사랑 기도 축복'이란 최고의 대우까지 해 주라는 역발상 주문을 접한다면 걸려 넘어지지 않을 위인이 누구일까! 그러나 주님은 틀리실 수 없다는 건 어떤 식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의 일반적인 상식과 정연한 합리를 접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원수사랑 이유를 꾸역꾸역 추정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께 죄인이고 원수였다. 그런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으셨다. 원수가 저지른 행악에 준하는 평형적 처벌을 가하지 않으셨다. 최소한 죽음의 삯은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원수사랑' 없었다면 국물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둘째, 주님은 우리에게 보복하지 않으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망각으로 없었던 일처럼 지나가신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복 자체가 되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중보하고 계신다. 사랑 기도 축복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었다. 행하신 분이 말씀하신 것이었다. 셋째, 부당한 세상에 반응하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이란 그 대상처럼 되어지지 않으면 아직은 지식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지식을 의미한다. 어거스틴 같이 되어야 어거스틴 신학이 이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의 철천지 원수인 죄와 사단까지 '원수'니까 사랑해야 하는 거냐? 이런 질문, 어딜가나 마주친다. 죄와 사단은 대적하고 미워해야 할 원수다. 사랑하지 마시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갚지 말라고 말씀하신 '원수'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면 사람들 중에 아예 원수가 없다는 얘기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그렇다. 원수가 없다. 우리에겐 '당당하게' 원수로 대우해도 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거룩함과 화평함을 좇아야 할 부르심을 받았다. '원수' 같은 사람을 원수로 대하는 순간 우리의 거룩과 화평은 훼손된다. 이는 악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을 가만히 두라는 얘기가 아니다. 합당한 징계와 적법한 치리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게 결코 아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제도이되, 사랑을 따라 집행해야 한다는 거다. 사랑이 빠진 권징의 사법적인 집행은 늘 과도한 분열의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했다.

예수님은 신인(Deus-Homo)이기 때문에 원수사랑 가능하신 거 아니냐? 십자가의 발자취 뒤따라간 믿음의 거인들이 있다. 두 사람이 떠오른다. 던져진 죽음의 돌이 온 몸을 소나기로 찍는 순간에도 스데반은 가해자를 향해 사랑의 기도로 축복한 분이셨다. 욥도 처음에는 원수의 고통과 재난을 보고 고소해 한 적이 없었고 원수들이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지도 않았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 가장 가까워서 가장 아프게 한 '원수' 같은 친구들을 결국은 사랑하고 기도하며 축복했다. 이처럼 주님의 은총을 힘입으면, 원수를 보복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의 실현이 가능하다. 원수사랑 계명은 단순히 그림의 떡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경건의 떡도 아니고 우리의 못난 수준을 정죄하고 기죽여 침통한 회개를 낚으려고 던진 떡밥도 아니다. 성도의 정체성과 삶의 실질적인 원리로서 제시하신 것이다. 원수가 없을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는 있다.

원수를 보복하는 건 월권이다.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이를 겨우 극복한 보복의 포기는 여전히 소극적인 처방이다. 나에게 원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러나 적극적인 처방으로 사랑 기도 축복까지 나아가면 그건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이다. 원수 당사자도 세상의 진정한 빛을 경험하기 때문에 유익이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념해야 하겠다. 가슴에 맺혀서 생각만 해도 소화가 안되는 분들이 있다면 사랑을 수혈해야 할 대상자 일순위다. 가장 어려운 그분부터 해치워야 한다. 그런 분의 악을 선으로 이긴다면 나머지는 덤으로 해소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인 처세술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고 그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리스도 예수를 비로소 세상에 제대로 증거할 어쩌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다.

내일은 이걸 영어로 설교한다. '웬수' 같은 영어를 사랑할 호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2013년 3월 16일 토요일

세상을 판단하라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6:2)

교회에서 벌어지는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의 부재를 질타하며 지나가듯 던진 바울의 언설이다. 문장의 문법적 구조에 따르면, 성도가 판단의 주체이고 세상은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궁극적인 의미에선 맞다. 그러나 그런 궁극적 의미가 구현되는 방식은 역방향을 취한다. 즉 곁모양은 세상이 성도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수동적인 해석이 썩 달갑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을 취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신법의 입법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늘 준행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어서다. 이런 판단의 수동성 때문에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세상을 판단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양태가 궁금하다.

신명기 4장 6절이 유력한 힌트를 제공한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 하리라.' 이를 우리의 '논리적인' 지각에 맞추어 풀어보면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열국 앞에서 우리의 지혜와 지식이 되며, 우리의 준행을 통하여 열방은 하나님의 규례를 듣게 되며, 결국 우리에 대해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란 평가가 이어진다. 순종이 지혜를 낳고, 지혜는 열방에 대한 복음의 전파를 낳고, 그것이 성도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낳고, 그런 방식으로 성도는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는 예기겠다. 이는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방식의 판단 개념이 반영된 해석이다.

신약에는 요한복음 14장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구절이 중요하다. 사랑은 모든 계명의 요약이요 총화이고 결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킨다는 말의 신약적 표현이 '사랑'이란 말이다.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안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면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빛 앞에서 그들이 '판단'을 당하게 된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재판정 안에서 판관석에 앉아 재판봉을 두들기는 그림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의 캄캄함을 드러내는 식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우리도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온전한 순종 즉 전인격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을 판단한다. 교회가 흔들리면 세상은 판단의 기준을 상실한다. 기준이 무너지면 방자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소견이 기준이다. 나아가 세상의 방자로 끝나지 않고 이방인 중에서 교회 때문에 하나님이 모독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이따금씩 하나님의 존재도 부정된다. 이는 세상에 의해 하나님이 부정적인 판단을 당하시는 격이겠다. 아무리 입술에 땀이 뻘뻘 흐르도록 복음을 증거해도 세상은 '너나 잘 하세요' 반응만 당당하게 보일 '튼튼한' 명분을 우리가 제공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 세상까지 예수님의 빛으로 판단하게 될 높은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집안에서 발생하는 형제간의 분란도 조정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어찌 세상의 거대한 규모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내실을 기하는 게 중요하다. 나부터, 가정부터, 우리 교회부터 사랑에 따르는 건강한 판단의 질서를 확립해야 하겠다. 우리의 다짐과 결심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임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2013년 3월 15일 금요일

사회적 칠거지악

인도의 간디가 1925년 10월 22일자 Young India 주간지에 실었던 일곱가지 사회적 악이라고 꼽은 내용이다.

Wealth without work: 노동이 없는 부
Pleasure without conscience: 양심이 없는 쾌락
Knowledge without character: 성품이 없는 지식
Commerce without morality: 도덕이 없는 경제
Science without humanity: 인간성 없는 과학
Worship without sacrifice: 희생 없는 종교
Politics without principle: 원칙 없는 정치

논문의 한 조각 발표한다

오늘 박사학위 논문의 한 챕터를 발표한다. 폴라누스 관점에서 본 신학과 철학의 관계성을 다룬다. 새로운 게 없다. 그동안 편만하게 주장되어 오던 주류 입장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격이다. 이름하야 절충주의.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명하고 전달하기 위해 괜찮다고 판단되는 방법론적 도구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자기만의 체계를 구성하는 태도 말이다. 폴라누스 아제도 그런 편집술에 능통하다. 그거 드러내는 논문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성경의 의미를 마구 주물러서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 신학을 떠나게 만들고 말았다는 세간의 주장에는 대립각을 세우고자 했다. 공부하며 느끼는 건 우리의 삶보다 더 좋은 성경해석 방법론이 있을까 싶다는 거다.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헤롯의 누룩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전3:8)

바울과 아볼로는 씨를 심었고 물을 뿌렸으나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세부적인 디테일을 설명하는 것은 사환의 본분이다. 그러나 복음의 생명력과 성장은 종들에게 맡겨지지 않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다. 진리를 물리적 파장으로 된 정보의 형태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지만 그 진리가 타인에게 실제로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고 무지의 억센 결박을 끊고 자유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몫이라는 이야기다. 전자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누구든지 스스로도 자랑하지 말고 사람도 자랑하지 말라고 바울은 강변한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자랑과 영광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만큼 계시한다. 사람이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선명한 발자국을 찍고 일말의 소소한 질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해명한다 할지라도 계시의 신적인 자율성과 분량조절 권한은 박탈되지 않는다. 여전히 언제나 하나님께 속하였다. 오직 성령으로 모든 것들을 보이시고 알리시고 통달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노방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강단해서 설교하고 교실에서 성경공부 인도하는 일체의 행위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다스리든 말씀을 전하든 아무것도 아닌 무익한 종이요 마땅히 하여야 할 일들을 하였을 뿐이라는 고백만이 합당하다.

도에 지나도록 높아지고 인간화된 지도자의 권위가 아까우신 분들은, 본문이 바울의 과격한 기질이 투영된 극단적인 수사일 뿐이라며 뭉개고 넘어갈 생각일랑 접으시라. 말짱한 중에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질서를 깡그리 무시하는 독자적인 제멋대로 행보를 두둔하는 말씀으로 간주하면 곤란하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더욱 그리할 것이라'는 바울의 권면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이 입장을 고수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을 자신의 사적인 권위유지 방편으로 오용하는 것은 지도자의 추한 모습이다.

강한 이빨과 글빨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에 준하는 대접과 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부패한 성정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곧장 저절로 취득되는 태도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거절하고 저항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성정에 반하는 일이어서 그렇다. 지식과 성취와 신분과 출신을 가졌다는 이유로 목에 뻣뻣한 힘이 들어가는 자연스런 '무의식적' 현상도 묵과하지 말아야 할 태도겠다. 씨와 물을 가졌다는 소유와 심었고 뿌렸다는 성취를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상석과 랍비라는 호칭과 뭇 사람들의 존경이나 흠모의 시선을 자신의 전유물로 여기는 졸부들의 천박한 모습이 때때로 관찰된다.

모든 영광의 주인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다가 충의 먹거리로 생을 마감한 헤롯의 누룩이 교회에 퍼지지 않도록, 그 퍼짐의 주역이 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깨어 있어야 하겠다.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신을 바꾸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렘2:11)

세계 전역에 특사를 보내서 각 나라의 종교성을 확인해 보라신다. 한 나라의 영광인 신을 다른 무익한 것으로 대체한 민족은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겠다. 조상들이 물려준 종교적 문화에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게 후손들의 도리이다. 어느 민족이든 신을 바꾸는 개종은 가장 불경한 일로 여기져서 이슬람의 경우는 각 가문과 공동체 안에서 개종자의 사적인 처형까지 눈 감아줄 정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랬단다.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다. 이는 하늘도 놀라고 떨고 두려워할 일이라고 선지자는 기록한다. 그러면서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궁극적인 고통이요 악이라고 진단한다.

나도 하나님을 신 아닌 것과 맞바꾸는 일에 민첩하다. 그런 거래는 때때로 의식의 속도보다 빨라 나 자신도 그러는 줄 모르는 중에 벌어진다. 흉측한 금송아지 건립하는 것 외에도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일일이 하나하나 지적하고 제거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들뢰즈의 처방과 처신처럼 스스로 지구를 떠나는 자실이 유일한 해법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것은 역시 하나님을 그분답게 알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계명을 달리 표현하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욥이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인물이라 한다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면 찬동의 고개가 숙여진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던 욥의 근본적인 문제와 한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누구냐' 문답법의 핵심은 욥이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에서 행위의 주체로 소급하여 하나님을 아는 귀납법이 인간적인 지식취득 원리라는 맥락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 과학자가 탐구의 삽바를 거머쥐고 일평생 매달려도 좋을 탁월한 자연과학 물음들을 욥에게 내미셨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미천함을 고백하며 손으로 경박한 입술의 우둔함을 가리기 시작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찌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고 고백했던 욥이지만, 막상 하나님의 직접적인 물음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승복했다. 하지만 욥의 그런 겸손의 모습을 보고서도 하나님은 욥에게 대장부의 어깨를 펴고 대답할 것을 다그치며 '누구냐' 식 질문들을 한 무더기 더 쏟으셨다. 이에 동방의 의인은 무소불능 하나님을 고백하며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는 하나님의 첫번째 물음에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했다'고 답하면서 자신의 가벼운 존재감을 티끌과 재에 비유하며 심오한 차원의 회개로 대화를 끝맺어야 했다.

매사에 '하나님이 누구냐'는 물음에 이끌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다른 것과 맞바꾸는 무의식적 불경은 누구든지 언제든지 얼마든지 저질러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밝히 보인다는 바울의 고백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쯤되면, 신앙이 뭐 이리 번잡하고 까다로운 일이냐고 따질 법도 하다. 그러나 그런 인상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와 결부된 것이다. 하나님이 싫으면 까깝해서 미칠 일이겠다. 그러나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무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면초가 상황을 사랑의 안목으로 본다면 해석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진실로 생수의 근원이고 최고의 영광이고 최고의 기쁨과 만족과 상급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부일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꼼꼼하면 할수록 더 세심한 배려와 사랑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본받으라 한 바울의 신앙이 목마르다.

비움과 참여의 미학

아바 아버지여 당신께는 모든 것이 가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하나님의 속성이 아들의 관점에서 고백된 구절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오직 자신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모든 것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무제한적 자유가 여기에 언급된 속성이다. 사람들은 이런 개념을 경계하는 동시에 열망한다. 타인이 가져서는 안되고 나만이 가져야 한다는 뜻이겠다. 그러니 '전쟁'은 규모와 무관하게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교회든 사회든 사람들이 출입하는 길목마다 벌어지는 권력과 이윤의 추한 쟁탈전은 일상처럼 흔한 광경이라 낯설지가 않다. 모든 사람들이 무소불위 권력과 막대한 부의 축적을 미친듯이 희구한다. 이유는 절대적인 능력의 확보로 무제한적 자유를 구가하고 싶어서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으로 인해 주에게서 멀어지는 무능과 부자유의 실상도 모르고서 말이다.

본문은 온 몸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강한 절박함이 쏟아낸 겟세마네 기도의 핵심이다. 전능과 자유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어떠한 차등이나 우열이 없는 공통적인 속성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셨고 당연히 전능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우리의 성향과는 반대로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철저한 무능과 전적인 부자유를 의미하는 죽음의 벼랑으로 스스로를 내모셨다. 그리고는 전능이 오직 아버지께 있다고 고백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란다. 이는 인간 문맥에서 보면 정신나간 부적응아 취급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겐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전적인 자기부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전적인 의존의 전형이다.

절대적 능력과 무제한적 자유는 그것이 없어서 당하는 불이익과 부당함 때문에 있기만 해도 좋겠다는 기호의 대상이지 그 자체로 가치인 것은 아니다. 가치의 산출은 활용의 영역이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로 썩는다는 법칙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모든 역사의 줄기찬 교훈이다. 문제는 권력과 자유의 유무가 아니라 늘 자신을 향하는 이기적인 활용의 부끄러운 수준이 문제겠다. 인간은 본질상 절대적인 권력이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무제한적 자유도 수사학적 욕망일 뿐이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간극을 망각하면 허망한 욕구에 일평생 종노릇할 수밖에 없어진다. 인간은 유한하며 의존적인 존재이고 자유에 있어서도 허용되고 만들어진 자유를 구가할 뿐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무제한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지극히 정상이다. 창조의 의도였다. 우리는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도록 지어졌다. 안식의 궁극적인 처소는 하나님 자신일 수밖에 없도록. 우리의 능력과 기호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절대적 권능의 무제한적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전능과 자유는 하나님의 원대로 활용될 때 최고의 가치를 산출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맡겨지면 온 인류가 집단으로 위험에 처해진다. 능력과 자유가 커질수록 위험도는 높아진다. 자신의 소원을 철저히 부인하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는 올바른 무능이 예수님의 기도가 가르치는 교훈의 핵심이다. 이는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비참이라 할 죄문제가 해결된 방식이다. 동시에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절묘한 비법이다.

'내가 강할수록 약해지고 약할 그때에 비로소 강하다'는 역설의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다. 전능의 자발적 박탈과 자유의 자발적 포기가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것을 부인하신 것보다 우리가 우리의 없음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인데도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도 버거운 게 현실이다. 여기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전능과 자유가 우리의 전인격을 관통하고 하나님의 신적인 기호가 생산하는 가치로 휩싸인 인생의 부요함이 들풀의 영광만도 못한 황제의 영광보다 비교할 수 없도록 낫다는 발상 말이다. 호흡이 코에 있는 인생에게 능력과 자유가 있다면 수에 칠 가치나 있겠는가!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적인 차원의 능력과 자유를 구가하며 영원한 가치 생산에의 참여가 가능하다.

이건 움켜쥐는 소유의 경제학이 아니라 서로에게 여백이 되어주는 참여의 미학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는 내 안에 거하시는 신비로운 소유를 위한 비움과 무소유의 지혜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배운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의 소원대로 무엇이든 되어지는 게 나의 벅찬 바램이다. 하나님의 전능이 나에게 강함이 되고 그분의 최상급 기호가 나의 소원이 되는 십자가의 자유보다 더 월등한 생의 비법이 있으신 분들은 재보해 주시라. '사글세'를 빼서라도 배우겠다. 그러나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않겠고 자랑할 것도 없다는 게 Paul의 판단이다. 무시로 개발되는 처세술이 특이성 때문에 일시적인 흥미유발 효과는 있겠으나 생이 종결되기 전까지 죄와의 전쟁이 중단되지 않는 게 생인지라 거품 이래저래 걷어내면 결국 십자가 뿐이겠다. 

2013년 3월 10일 일요일

마음의 즐거움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 것이로다 (시105:3)

즐거움은 자발성의 가장 기초적인 토양이고 즐겁지 않으면 모든 게 고역이다. 비자발적 삶을 마지못해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인생은 없다. 삶이 예배라면 타율성에 떠밀린 인생은 억지로 드리는 예배일지 모른다. 물론 외부의 타율을 외면해도 될 정도로 녹록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만 잘 한다고 해서,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형통의 대로가 인생에 거침없이 뚫리는 게 아니어서 그렇다. 이는 또한 지구촌 인구의 중다한 수효만큼 많은 사연들이 한 개인의 생을 마치 뒤엉긴 실타레와 같이 휘감고 있어서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속사정을 슬쩍 찔러 보면 곧장 심장을 후비는 듯한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와르르 쏟아낸다. 나라와 민족도 사정은 동일하다. 삶이 너무나도 고달프면 자신의 호흡을 스스로 제거하는 일도 발생하고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고삐 풀린 살육전 돌입도 불사하다. 이는 생의 비참보다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의 현실화고 비참의 문제를 스스로 풀고 땅에서 해법을 얻으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즐거움의 상실은 비극이다. 그 빈자리는 언제나 근심과 슬픔과 분노가 차지한다. 근심으로 인생의 견고한 등뼈가 썩어가고 슬픔으로 마음의 든든한 제방이 무너지고 분노로 인해 행위의 건실한 규범이 와해된다. 즐거움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하다. 그런 회복으로 인해 인생의 표정은 밝아지고 민족의 신수도 훤해진다. 그러나 땅바닥에 떨어진 돈처럼 해 아래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시인은 마음의 즐거움이 여호와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모든 게 그렇듯이 마음의 즐거움도 신비로운 현상이다. 마음을 존재로 부르신 분도 주님이요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도 주님이 조성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신적인 기원을 가진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태생적인 속성이다. 변경과 조작이 불가능한 창조의 원리라는 얘기다.

물론 웃을 때에도 마음의 저변에는 슬픔이 있고 그 말미에 껄끄러운 근심이 예외없이 끼어드는 조작된 즐거움이 없지는 않다. 모두 땅에 기초한 경우겠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구할 때에 즐거움이 생기도록 지어졌다. 그런 생기를 인간에게 주입하신 거다. 그러니 썩어 없어지는 것에서는 도무지 만족하질 못한다. 은을 좋아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는 전도자의 지적은 정확하다. 해 아래의 것으로는 마음의 즐거움에 이르지를 못한다는 얘기다. 인간이 그렇게 지어졌다. 하늘과 땅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여호와 뿐이라는 것은 창조의 원리에 지극히 충실한 자세이다. 인간을 위해 6일동안 준비된 만물과 자연은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을 즐기며 그분을 노래하는 안식처다. 가난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한 일들이 산더미로 짓눌린 인생의 진정한 해방구는 창조적 질서의 회복에서 찾아진다.

'여호와'를 구하는 질서의 회복에서 마음의 즐거움이 회복된다. 우울증도 저리 비키시라!

2013년 3월 8일 금요일

높으신 자에게로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호세아 7:16)

성경에서 회복의 방법은 새롭게 된다는 혁신이나 변혁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다. 종교개혁 정신의 핵심도 진리의 새로운 고안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언제나 본질은 그대로고 기능의 변화만 미친듯이 일어났다. 자동차는 발의 연장이고 인터넷은 대화의 연장이고 인공위성 및 현미경과 망원경은 눈의 연장이고 핵무기는 주먹의 연장일 뿐 인간의 궁극적 가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들이다. 기능의 신장과 유용성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가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회복의 방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돌이켰다. 그러나 돌이킴의 종착지가 문제였다. 높으신 자에게가 아니었다. '곡식과 새 포도주 때문에' 돌이켰던 거다. 돌이킴의 방향이 과녁을 벗어났다. 먹고 마시는 게 과녁이고 하나님은 거기에 이르는 방편으로 동원된 셈이었다. 주님께서 돌이킬 수 있도록 '팔을 연습시켜 강건하게 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악을 꾀하는 도구로 쓰였단다. 그래서 '속이는 활과 같다'고 비유했다. 빗나간 돌이킴을 주도한 방백들은 결국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 신세가 될 것이란다.

진정한 회복은 언제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풍요와 건강과 편리는 물론이고 지혜와 정직과 겸손과 관용과 친절과 사랑과 연합과 화해와 용서와 지식과 긍휼과 거룩과 영생조차 우리가 돌이켜야 할 회복의 종착지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대개 하나님께 돌아간 결과이다. 결과가 원인의 필연성을 강제하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에 나의 사모할 자는 오직 여호와 뿐이라는 고백만이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 돌이킴이 우리에게 있다면 힘과 뜻과 마음과 목숨까지 수단으로 삼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생의 최상급 가치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적었다'는 호세아의 잇따른 기록에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그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이되 전인격을 수단으로 삼은 것이라면 결국 인생을 위하여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은 우리 자신이 수단이 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예기겠다.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것, 즉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까지 수단으로 삼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의 종노릇만 일삼았던 애굽 시절의 그 비참한 조롱거리 신세로 돌아가는 것과 일반이다.

호세아는 결구에서 다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자' 한다. 그리고는 여운이 짙은 물음을 남긴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의인만이 그 도에 행한다'는 자답으로 호세아는 깨달음과 지식을 행함과 연결하고 이렇게 실행하는 자가 의인으로 알려질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예언의 붓을 꺾었다. 아무리 유익하던 것들이라 할지라도 회복의 종착지에 이르지 못하도록 걸음을 현혹하는 유익이라 한다면 바울처럼 언제든지 해로운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겠다. 어느때나 배설물 자랑은 각광을 받았고 경쟁도 치열했다. 돌이키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가는 교회의 회복을 기도한다.

2013년 3월 7일 목요일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분이로다 (시33:15)

벌거벗은 느낌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사를 아신단다. 의식을 마비시킨 대목은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창조자의 자리에서 아신다는 앎의 천상적인 질이었다. 도대체 지으신 창조자가 지어진 창조물을 아신다는 것은 어떤 차원일까? 상상력의 근육이 뻗뻗해질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피조물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한 지식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일텐데, 그 분량과 정도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아서다. 서로의 지식이 적당히 가리워진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이 필요하고 비로소 관계가 맺어진다. 음이든 양이든 지식이 자랄수록 관계도 깊어진다.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을 고려할 때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쉽게 그려지질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모든 인간이 떳떳한 것보다 켕기는 게 많아서다. 나에 대한 타인의 지식이 깊을수룩 두려움도 가중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강점은 은근히 노출하고 약점은 가리거나 미화한다. 관계를 맺더라도 솔직한 민낯으로 만나지 않고 사회적 아바타로 얼굴을 가린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는 이미 상식이고 암묵적인 합의이다. 물론 가리는 문화는 아담과 하와의 태초로 소급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지칠 줄 모르고 그 콘텐츠의 종류와 분량이 줄기차게 급성장한 문화가 바로 은폐의 문화였다. 그 배후에는 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어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좋겠다는 일반의 심사가 작용했을 터다. 자기 양심의 조밀한 그물망도 투과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벗겨먹을 심산으로 약점의 은밀한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실 분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지식의 분량과 사랑의 질이 비례적 관계를 가졌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아시면 아실수록 우리에게 좋은 일이겠다. 남편과 아빠로서 아내와 자식들을 아는 나의 지식은 유한하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사랑이 그 지식의 한계선 밖으로는 확장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제한이 없으시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아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높고 깊고 길고 넓으시다. 당연히 자애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택하는 게 현명한 일이겠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으시다. 아시면서 모른 척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각이 미칠 수 없는 영역까지 다 커버할 것이다. 주먹 한 덩어리의 뉴우런을 펼쳐서 커버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이 지구의 표피만도 못하다면,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신 자로서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분량일 것이다. 그런 무한한 차원의 지식이 무한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가 겨우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확인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의 일각의 일각일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고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갑절로 급하게 박동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만홀히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섬뜩하고 오싹한 마음 가누지를 못하겠다. 스스로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려는 그런 무례함이 가슴 한 구석에서 음흉한 미소를 퍼뜨린다. 죄가 청하는 가증한 결탁의 악수를 뿌리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거머쥐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죄를 범하여도 탈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나와 동류로 여기려는 사악함이 무시로 의식을 자극하고 때때로 장악한다. 방자함의 이러한 극치에 이르러도 하나님의 이렇다 할 반응이 감지되지 않으면 급기야 무신론의 땅 출입도 불사한다. 인간이 이렇다. 자신의 무지로 하나님의 전지를 덮으려는 것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침묵과 인내를 그렇게 해석하고 처신한다. 

주님께서 제대로 반응하면 끝장인 줄 모른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있다는 선지자의 통찰을 애써 외면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할 만큼 두려워할 자가 없다는 시인의 지적은 너무도 정확하다. 하나님은 일반의 심사를 지으셨고 모든 행사를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침묵과 인내는 몰라서 초래되는 무지의 무반응이 아니었다. 아시면서 우리가 돌이킬 회복의 시간적인 여백을 마련하신 거다. 아시면서 그러셨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온갖 일들을 그 원인과 출처와 정도와 성격과 본질과 목적까지 아시면서 여전히 아침마다 죄인과 선인에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빛을 비추시고 적당히 비도 내리시는 거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참 무지하다.

주님의 사랑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터질 듯하다.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도무지 측량되지 않아서다. 아예 가슴이 터지도록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념해야 할 일이겠다. 동시에 그런 사랑이 우리의 무지와 무신경에 눌려 침묵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가슴을 터지게 만든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셔야 할 일이겠다. 이러한 극과 극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하루하루 관찰한다. 이중창을 투과한 뒷뜰 풍경은 환한 햇살로 수북하다. 출처모를 바람이 준동한 나뭇가지 부딛히는 가벼운 소리가 그 풍경과 어울린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오늘도 연장되나 보다. 일반의 마음이 그렇게 느끼도록 의도하신 듯하다.

2013년 3월 6일 수요일

개미의 교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6:6)

만물의 영장이 하찮은 미물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전제된 구절이라 불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라고 하신 말씀이다. 인간이 곤충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게으름은 아주 평범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사례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다. 지혜와 여호와 경외는 분리될 수 없고 경외가 깊은 사랑의 결과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가 다 그렇듯이 여호와 경외의 부재, 나아가 사랑의 빈곤이 결국 게으름의 원흉이라 하겠다. 개미는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지혜자가 지목한 최고의 스승이다. 물론 우리의 영광과 감사는 그 개미를 지으시고 그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신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겠다.

지혜자가 관찰한 개미의 지혜로운 행실은 딱 하나다. 즉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는데 여름 동안에 양식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곡식을 모은다는 거다. 행위의 주체가 단수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본문의 초점이 공동체 의식이나 협동정신 같은 집단적인 교훈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율성이 여기서는 지혜의 핵심임을 확인한다. 외부의 권위와 지시와 강압이 개미의 행실을 유발하지 않았다는 그런 자율성 말이다. 물론 개미의 자율성은 본능적인 것이다. 개미의 행실이 겨울의 혹독한 환경을 예측하고 여름과 추수기가 양식을 비축할 적기라는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합리적 행위라는 의미의 자율성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태를 분별하고 행실을 조절하는 보다 고급한 상황판단 기재를 가진 인간이 지혜를 상실하면 개미의 본능 의존적인 행실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관이 보란듯이 펼쳐지는 거다. 사실 어느 사회를 보더라도 인간은 지도자와 감시자와 권위자가 생략된 환경에서 사람답게 생각하고 처신하는 경우가 대단히 희귀하다. 자율성은 없고 충만한 타율의 반응자로 살아간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독재가 사라지면 자유로운 삶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감지된다. 진정한 자율성은 사실 외부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다. 감옥에서 죄인과 노예라는 신분의 외투를 걸친 오네시모 면전에서 그를 형제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바울의 행실이 대표적인 자율성의 발휘라고 하겠다.

자율성은 사회적인 인간문맥 안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신앙의 본질도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지도자요 감시자요 주권자다. 그러나 그분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렇게 안계시는 분처럼 스스로를 감추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건 여호와를 본 자는 살지 못하기에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의 은둔이다. 동시에 여호와를 본 것에 근거하여 행위가 촉발되는 그런 타율성을 방지하는 배려시다. 하나님은 두령과 간역자와 주권자의 부재 속에서도 스스로 올바르게 처신하는 개미처럼 우리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숨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생산하기 위해 위협과 강압의 짱똘을 던지지 않으신다. 감독자의 억압적인 눈빛을 흘기지도 않으신다. 자원하는 심령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강제적인 법령의 형식으로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기셨고 준행할 부드러운 마음도 지으셨던 거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극도의 자율성이 발휘되는 사랑의 결과로서 진정한 순종이 비로소 가능함을 잘 보여준다. 보상의 잿밥에 눈이 어두워 투자 차원에서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의 형벌이 너무도 과중하여 두려움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의 일환으로 순종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이 아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의 도의적인 보답 차원에서 마지못해 드리는 인색한 순종의 제사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순종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자원하는 마음이다.

지혜자의 조언을 따라 개미가 살아가는 방식을 꼼꼼하게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라면, 모든 영역에서 두령과 간역자와 주권자의 유무와 무관하게 사랑의 자율성을 따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경주해야 하겠다. 행위의 속도와 지구력 문제는 게으름의 본질이 아니라 결과다. 사랑의 자율성이 없으면 누구도 게으른 자의 혐의를 털어내지 못한다. 진정한 순종의 주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율성의 소유자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싶다...

2013년 3월 5일 화요일

구제의 은밀함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레19:10)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구제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런 은밀함의 원칙은 점진적 계시가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때에 비로소 반포되지 않았다. 율법이 주어지던 첫 순간에 이미 구체화된 원칙이다. 계시의 점진성은 내용의 추가가 아니라 의미의 판명성과 관계된 것임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물론 예수님이 '새 계명'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추가하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 계명이 있다. 허나 요한은 이것도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이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과 같은 방법론의 추가일 뿐임을 잘 지적했다. 물론 꼼꼼히 따지자면 방법론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겠다는 말씀에 함축된 것이기에 '새롭다'는 수식어 붙이기가 어색하다.

본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제의 은밀함이 저변에 짙게 깔린 계명이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고 떨어진 열매는 줍지 말라'는 부분은 낭비와 손해를 권유하는 듯해 그 첫인상이 낯설다. 그러나 분명한 두 가지의 합목적적 이유로 제시된 명령이다. 첫째,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의 구제를 위함이다. 포도원의 수확하지 않은 열매와 떨어진 것들은 그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달되는 절묘한 방식이 예술의 경지에 가깝다. 공급자와 수혜자가 서로 민망하게 대면할 필요가 없는 방식이다. 재화의 이동으로 인한 두 당사자 사이의 미묘한 주종관계 형성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구제를 해도 보상의 책무와 기대가 각자에게 촉발되지 않는 방식이다. 공급자는 생색을, 수혜자는 불쾌한 동정의 느낌을 가질 수 없는 방식이다. 공급자는 오직 은밀히 갚으시는 하나님만 기대하고 수혜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접고 과수원 주인이 될 필요까진 없다. 교회에는 '헌금'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 19장의 정신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일단 '헌금 실명제'를 폐기해야 한다. 헌금의 액수가 바닥까지 추락할지 모를 가슴 철렁한 제안인 줄 안다. 이런 위기감 자체가 중병의 증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가 가난을 감수하고 오른손의 일을 왼손은 물론 타인의 손까지 알도록 적극 들키려는 생색의 여지를 말끔히 제거하는 것이 교회가 영적 부요함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한다. 헌금의 근수에 기반한 권력 키재기도 사라질 효과까지 기대되는 처방이다. 연말정산 소득공제 혜택과의 남루한 거래 혹은 금전적인 투자 개념으로 헌금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도 방지된다. '헌금 실명제'만 폐기해도 이렇다. 이런 제안이 불편한 분들은 지원군을 찾아 성경구절 부지런히 뒤지시면 되겠다.

본문의 두번째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여호와란 사실에서 발견된다. 구제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즉 은밀한 구제는 하나님의 주시는 속성과 그의 백성된 우리의 신분 때문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은밀한 중에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은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구제 방식에 비하면 아주 간소한 흉내요 조촐한 연습에 불과하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늘 주시는 분으로 계시되 우리가 땅의 지각으로 능히 감지할 수 없는 은밀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까지 선물의 항목으로 포함시킨 분이시다. 우리 자신이 타인과 이웃에게 주어질 것을 의식하고 구제하되 은밀함이 보존되는 방식으로 예술의 경지까지 이르는 섬김의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아~~ '너나 잘 하세요' 항목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일평생 하나님의 진리 한 조각만이라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지향점은 변경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교회가 구제의 예술적 은밀함을 통해 하늘의 진품이 전시되는 겔러리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은 가슴에 끝까지 간직하려 한다. 

2013년 3월 4일 월요일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와의 동거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15:11)

같은 문맥에서 예수님은 천상의 윤리로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희생이 요구되는 말씀을 접할 때마다 해석학적 도피가 의식을 빛의 속도 수준으로 장악한다. 본능에 가까운 이런 반응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성향이기 때문에 떳떳한 공감대가 순식간에 형성된다. '경내'에 곤란하고 궁핍한 자가 없도록 외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좋겠다는 낯뜨거운 해법까지 뻣뻣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전혀 이상하지 아니하다. 인간의 죄성을 관습과 제도로 가리는 행습은 아담과 하와가 태초부터 이미 현저한 모델로 선보였던 바여서다.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에게 긍휼의 손을 뻗으라는 것은 명령이다. 당연히 해석학적 차원의 마사지를 불허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냥 명하여진 그대로 행하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불편하고 거북하다.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적 해석'의 후진성을 꼬집으며 자기방어 모드로 들어간다. 본인뿐만 아니라 유력한 자들의 인색에 종교적 면죄부도 발부해야 할 사회적 '책무'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번뜩이는 학자들의 협조를 얻어 역사적인 맥락도 살펴보고 어원적 뿌리도 뒤진다. 수천년 전에 주어진 명령이라 어떻게든 빠져 나갈 구멍이 있을 것이라는 경도된 일념으로 때로는 본문의 오류 가능성과 원어로 된 사본의 부재 문제까지 건드린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면 결국 귀에 달콤하고 구미에 당기는 해석을 요리해 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말씀의 본의를 잃는다는 거다. 행하고자 하면 아버지의 뜻에까지 소급되는 의미의 궁극에 이르지만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면 말씀의 인간화가 불가피한 결과겠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속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이 만물의 주관자란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자나 빈자나 속이는 자나 속는 자나 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부하다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우월성의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뒤따르는 현상이다. 물론 자신을 마땅히 복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의 근원이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마음껏 유통되는 통로요 방편이다. 자신을 복의 최종적인 수혜자로 여기면 사해처럼 생명력을 상실한다. 지식이든 건강이든 재산이든 권력이든 성품이든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들은 그런 유통의 목적을 이루도록 그 진가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선물이다. 주변에 가난하고 곤란을 겪는 형제가 있다는 것은 선물의 진가가 발휘될 기회인 것이다.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그에게 넉넉히 꾸어 주라'는 명령을 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범사에 우리의 손으로 하는 바에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모세의 에드립은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에 근거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상황이나 사태들이 많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곤란하고 궁핍한 형제와의 화목한 동거는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되고 그 섭리가 증거되는 신비로운 장치이다. 종교와 도덕을 불문하고 이런 동거가 실현되는 현장에는 밑에서 시작된 혁명의 필연적인 수반이 목격된다. 현란하고 떠들석한 혁명이 아니라 가슴을 움직이며 번지는 잔잔한 혁명 말이다. 구제라는 것은 초대교회 정체성의 한 기둥이다. 의미상의 왜곡과 변질에 시달리긴 했으나 그래도 구제는 여전히 아름답고 향기롭다. 모든 교회가 각자의 경내에서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들을 요란하지 않게 진심으로 돌아보면 어떤 혁명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너나 잘 하세요' 멘트가 나를 노려본다. 맞다. 나부터 잘 해야지...

2013년 3월 3일 일요일

멀러의 도르트 신조 이해

멀러 교수님이 쓴 도르트 신조에 대한 짧은 기고문을 정리한다. 도르트 신조는 유럽 전역의 개혁주의 진영에서 총대들이 파견되어 개혁주의 교리의 왜곡된 부분을 반듯하게 펴려는 범국가적 시도의 산물이다. 이 총회를 촉발시킨 주범은 레이든 대학의 유니우스 후임자인 Jacob Arminius다. 그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면, 1) 은혜는 저항될 수 있다, 2) 인간은 구원받은 이후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효하게 될 정도로 그 은혜를 저항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선택은 미래의 믿음에 대한 예지에 기초한다, 4) 벨직 고백서와 하이델 교리문답 일부는 수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Arminius가 죽은 이후에 그를 추종하는 46명의 무리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항론서(1610)'를 제출했다. 이에 네델란드 국회의 이름으로 총회가 소집되고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까지 진행된다.

멀러는 '칼빈주의 5대교리' 혹은 '튤립(TULIP)'이란 관점으로 도르트 신조를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신조가 5가지 교리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칼빈주의 사상을 5가지 교리로 압축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항론파가 제출한 항론서가 5가지 항목을 포함하고 있어서다. 개혁주의 교회의 보다 광범위한 가르침은 벨직 고백서와 하이델 교리문답 안에 담겼으며 도르트 신조는 왜곡된 교리수정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고 멀러는 꼬집는다. 그는 도르트의 다섯가지 헤드라인 주제들을 4가지로 분류한다: 1) 신적인 선택과 유기, 2) 그리스도 죽음과 인간의 구속, 3-4) 인간의 타락과 회심, 5) 성도의 견인. 여기서 멀러는 신조의 실재적인 순서가 '성도의 견인' 외에는 튤립의 머리글자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무조건적 선택'에 대해서는 신조의 문구 그대로를 따온 것이라고 수긍한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신조의 본래 취지를 왜곡할 소지가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첫번째 주제는 무조건적 선택만을 다루지 않는단다. 인간의 범우주적 죄성, 죄의 삯으로서 영원한 사망, 복음증거 방식으로 그리스도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도도 핵심적인 주제로 언급되고 있어서다. 특별히 이 항목에선 불신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죄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지 하나님께 돌려질 수 없음을 명토박아 둔다.

이어지는 두번째 주제는 그리스도 죽음을 죄에 대한 충분하고 완벽한 만족으로 여기면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충분한" 구원의 은혜로운 본질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충분성은 복음이 온 인류에게 선포될 것이라는 도르트 선언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실로 그리스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신조는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멀러는 '제한적인 속죄(limited atonement)'라는 영어의 근대적 어구에 유감을 표명한다. 분명 도르트는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이들만이 은혜로 인하여 믿음을 가져 구원에 이른다고 밝히면서 불신의 과오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고 선언한다. 이것을 'limited atonement'라는 19세기식 영어표현 속에 구겨넣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당시의 표현 그대로를 존중하면 좋겠단다. 본문에는 구원이 인간의 선행이나 믿음의 선택이나 신적인 예지에 근거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은혜로운 선택에 기초한 것이라는 내용이 언급된다. 하나님의 선택이 영원부터 신적으로 의도된 무조건성 및 불변성을 가졌음도 밝힌다. 정죄 혹은 저주는 전적으로 죄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계획을 탐구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죄에의 슬픔과 의에 대한 갈증에서 온다고 말한다. 유기는 하나님이 영원부터 순전한 사람들을 버렸다는 식으로 표상되지 않는다는 등등의 내용들.

세번째/네번째 주제는 인간의 조건과 회심이다. 죄악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무능력, 특별히 의의 천상적인 기준을 충족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은 은혜의 무조건성 부분과 직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적인 부패'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도르트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 선에 대한 지각을 가졌으며 그것을 성취할 의지도 지녔다고 말한다. 하여 멀러는 이를 인간이 자신의 죄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 (The utter inability of human beings)' 교리라고 주장한다. 복음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구원에 이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로 부패한 인간을 되살리고 치유하는 주된 수단이다. 성례와 권징도 수단으로 언급된다. 물론 성례와 권징은 복음의 증인으로 기능한다. 말씀과 성례와 권징은 교회의 삼중적 표지이다. 교회의 삶과 활동을 규제하는 불쾌한 제한이 아니라 진정한 교회의 정체성을 표명하는 수단이다.

다섯번째 주제는 성도의 견인인데 여기서도 오해가 때때로 빚어진다. 여기서 성도의 견인은 죄에 대한 쉬운 승리나 구원의 첩경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란다. 오히려 신조는 중생이 성도들을 죄에서 완전하게 해방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급히 지적한다. 성도의 삶은 무수한 실패와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신조가 가르치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좌초할 수 있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실패할 수 없는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주목한다. 은혜의 수단은 견인의 수단도 된다는 뜻이겠다. 결론으로 멀러는 도르트 신조가 성경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결코 스콜라적, 사색적 혹은 철학적 문헌으로 규정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고백서나 교리문답 성격과는 아주 판이한 쟝르여서 문헌적인 성격 규명이 간단하지 않다는 심상치 않은 여운도 남긴다.

도르트 신조에 대한 멀러의 이 단편글은 문서의 물리적인 역사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 마디로 역사적 문헌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다. 신조에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신학자 개개인의 몫일 수는 있겠으나 신조 자체가 전달하는 내용과 강조점 자체를 가감하는 왜곡의 방식으로 그러지는 말자는 얘기겠다. 일리도 있고 수긍도 간다. 그렇다고 이것을 신조의 행간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의미를 탐구하고 해석하고 표명하는 일 자체를 접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문헌에 대한 멀러 교수님의 역사적 접근법 외에도 다양한 과제를 수행해야 할 학자들의 다른 유용한 접근법이 있고 그것이 존중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 문헌에 근거하여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엄밀하고 심오한 의미를 탐구하되 신학적 정당화의 일환으로 신조 자체에 변경을 가하는 과한 태도는 경계해야 하겠다. 사실과 해석을 분명하게 구분하며 도르트 신조의 장점과 강점을 존중하되 기독교 진리의 심오함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한계도 지적하는 식으로 각자의 소임에 충실하면 좋겠다.

Richard Muller, "The Conons of Dort," Forum (2013, Winter) in Calvin Theological Seminary

내가 응하리라

그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호2:21-22)

역사를 푸는 다층적인 인과가 가장 뚜렷하게 증거된 구절이다. 인간의 삶이 음식의 풍부나 빈곤에 있다면 그 바탕은 땅의 문제이고 한발짝 소급되면 하늘의 문제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근원적인 역사의 주관자로 계시다는 얘기겠다. 성경에는 양식의 문맥에서 역사를 푸는 경우도 있고 땅의 척박과 비옥으로 풀기도 하며 하늘의 현상들이 역사의 광음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성경은 어떠한 차원의 인과도 소홀히 다루지를 않는다. 배우고 따라야 할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모든 인과들이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충실한 방편들로 동원되고 있다는 인과의 전체적인 그림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근원을 하나님 밖에서 찾는다. 물질적 생산력에 근원을 둔 유물론과 땅의 질서에 근원을 둔 자연주의 및 하늘의 변화에 근원을 둔 점성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들 그럴듯한 일리와 유력한 근거를 가졌지만 진정한 근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면에서 헛다리를 짚었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응답이 다양한 인과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으나 결국 '내가 응한다'는 선언이 핵심 포인트다. 신명기가 율법의 위반과 준수를 기준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하고 역대기가 역사를 움직이는 원인으로 사람의 행실을 지목하며 가깝게는 므낫세의 악행이, 멀게는 여로보암 범죄를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으로 언급한다.

물론 호세아도 이런 율법과 인간 문맥에서 벌어지는 인과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깊은 근원으로 소급하여 인과의 끝자락을 진단하는 노골적인 '근원으로 돌아가는(ad fontes)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 소종하다. 북왕국 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호세아 시대가 보인 극도의 종교적 타락과 영적인 빈곤은 '이 나라가 하나님을 떠나 크게 행음'한 것으로 묘사되고 아담이 그 주범으로 지목된다. 결국 아담을 시초로 하여 온 인류를 관통하는 죄문제가 역사 전체를 푸는 열쇠라는 얘기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인류의 궁극적인 흥망을 좌우하는 마지막 인자는 아니라는 사실이 호세아의 묘미이며 핵심 메시지다.

죄의 끔찍한 본색을 암시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광야와 아골 골짜기다. 낮에는 죽음의 열기가 위협하고 밤에는 살인적인 냉기가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는 광야에는 생존을 가능하게 할 어떠한 조건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곳이고 아골 골짜기는 사망의 악취와 흉물스런 뼉다귀가 나뒹구는 공간이다. 죄의 삯이 가장 선명하게 목격되는 현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비로소 비옥한 포도원을 베푸시며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겠단다. 죽음이 사망에 삼키운 바 되는 구체적인 성격이 이보다도 더 짙게 묘사될 수 없도록 논지가 명쾌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끌려 다니시는 수동적인 통치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 이 구절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완전한 자유를 강조하고 그런 주님만이 모든 역사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계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역사의 운명이 죄에 맡겨지지 않아 행복하고 감사하다. 주님의 무궁한 긍휼과 자비가 인류의 진멸을 방지하는 유일한 열쇠여서 더욱 그러하다. 어떤 순간에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온 역사에 응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이는 너무나 마땅한 절망의 순간에도 좌절의 방석에 주저앉지 않아도 될 마지막 소망의 근거겠다.

호세아는 이런 하나님을 인륜지 대사로도 입증하고 선포하는 선지자의 길을 걸어간 인물이다. 예수님의 동명이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호세아의 기록이 유난히 향기로운 주말이다.

2013년 3월 2일 토요일

윌리엄 구지의 Of Domesticall Duties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의 Domesticall Duties (1622)가 조엘 비키에 의해 현대어(Building a Godly Home, 2013)로 거듭났다. 주로 에베소서 5장의 주석과 그것의 실천적인 적용으로 구성된 책이다. 이 책을 재구성한 비키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동일한 진리를 증거하며 구지의 책은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 성경적 가정 만들기의 교범이라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2006년에 그레그 폭스(Greg Fox)가 편찬한 판본과 어떻게 다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1개월에 한 권 정도 퓨리탄을 일독한다. 이번에는 퓨리탄 가정의 실상을 살펴보려 한다.

William Gouge, Building a Godly Home (RHB, 2013)
William Gouge, Of Domesticall Duties (Greg Fox, 2006)

2013년 3월 1일 금요일

헤세드와 다아트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엘로힘) 아는 것(다아트)을 원하노라 (호6:6)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법의 달인이다. 제사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소통의 창구였다. 제사를 통하여 죄인은 하나님을 향해 화목의 첫걸음을 내딛였고 번제는 완전한 헌신과 희생의 증표였다. 그런데 그런걸 다 접으란다. 그런 거 꼴도 보기 싫다는 뉘앙스도 감지된다.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은 제사와 번제의 부재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 문제였고, 그가 진정으로 기뻐하신 인애와 지식의 빈곤이 문제였다. 이런 문맥에서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파기 핵심은 헤세드와 다아트 문제였다. 이웃 사랑이 없었고 하나님 지식이 없었다는 거다.

선악과를 따먹고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는 결과였다. 당연히 선악과의 원상복귀 및 율법적 명제의 꼼꼼한 준수는 근원적인 해법이 아닐 것이다. 행위의 복원으로 수습될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혁을 요청하는 사안이다. 자아가 늘 해법의 마지막 방해물로 있는 한, 어떤 자구책을 마련하는 식으로는 도무지 풀어지지 않을 일이겠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것 외에 다른 뽀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셨고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절정이 되시었다. 사랑이든 지식이든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뻐하는 아들이다.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신 사랑 때문이며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 지식에 완벽하게 정통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헤세드와 다아트의 총화시다. 첫번째 아담이 파기한 언약의 진정한 회복은 두번째 아담의 몫이었다. 인류는 첫번째 아담의 언약파기 행보를 답습했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두번째 아담이 회복시킨 언약의 수혜자로 살아간다. 수혜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헤세드와 그로 말미암는 엘로힘 다아트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최상의 선물이란 얘기다.

때때로 축복을 고단한 수고로 여기고 선물을 건조한 관념으로 여기는 자신과 마주친다. 호세아 선지자가 목젖이 떨리도록 강한 호통의 고음을 빚어낼 일이겠다. 멸망의 첩경인 줄도 모르고 나른한 일탈의 발걸음 내딛는 일 없도록 정신줄을 팽팽하게 당겨 헤세드와 다아트의 조합이라 할 언약을 또다시 짓뭉게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오늘은 왠지 내게 인애가 있는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지, 언약을 언약으로 존중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성찰하는 하루이고 싶다. 인애와 지식이 어우러진 언약의 수혜자로 제대로 살아가는 하루 말이다. 

하나님의 친절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창15:5)

이는 천체의 움직임을 보고 인생의 미래를 예측하는 점성술 두둔용 멘트가 아니다. 시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변하지 않을 외적 증거로서 마치 언약의 무지개와 같은 용도로 하늘의 별들을 언급하신 거다. 칼빈은 청각적인 말씀에 시각적인 뭇별을 추가하여 귀와 눈의 공감이란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efficacius) 아브람의 믿음을 돕고자 한 여호와의 친절로 이해한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감추어진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도구로서, 훤한 대낮에는 숨었다가 분주한 동작이 중단되는 야밤에 존재감을 발휘하는 별들의 기이한 광경(mirabile speculum)보다 더 좋은 게 없었겠다.

하나님 자신이 지고의 상급이란 말씀의 의미가 아직은 어두워서 아브람은 선물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당장 긴급한 현안으로 상속자 이야기를 꺼냈다. 씨를 주시지 않았다는 푸념과 함께 집에서 길리운 몸종이 후사가 될 수밖에 없는 실태를 토로한다. 집을 떠나라고 부르실 당시에 내거신 '너로 큰 민족을 이룬다'는 첫번째 공약이 대화의 밑바닥에 전제처럼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전체를 아시는 하나님은 아브람의 불안한 심경을 읽으시고 세월이 수정할 수 없는 뭇별의 중다한 수효를 보이시며 달래신다. 이에 아브람은 공약의 확고한 성취도 믿었을 것이지만 굳이 성경은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여호와가 그의 의로 여겼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는 '여호와가 누구다'는 어법으로 계시를 이어간다.

별은 긴 역사의 표상이고 그것의 존속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뭇별의 항구적인 운행을 주관하는 분이 그것을 증거로 채택하여 언약의 불변적인 성취를 설명하는 본문에서 우리는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자신이며 자신을 지고한 상급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읽는다. 다윗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고 궁창에서 그 손으로 하신 일의 계시를 목격했다.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운행하는 태양의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가 없다는 언급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 누구도 핑계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이사야는 해와 달과 별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비취지 않을 것은 오직 여호와가 우리에게 영영한 빛이 되며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영광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별의 항구성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약을 신뢰하는 것은 아직도 비유에 머문 신앙이다. 자연의 모든 항구적인 질서와 하나님의 언약은 믿음의 조상처럼 '여호와를 믿으니'에 이르도록 우리를 이끌고 설득하는 하나님의 친절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의 체질이 녹더라도, 비록 하나님의 언약이 더디 성취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겠다. 태양도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빛바랜 비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