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2일 일요일

책의 우주

세기의 책벌레,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 사이에 오고간 대담집, [책의 우주]을 잼나게 읽었다. 책에 대한 무수히 많은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읽는 내내 두 책벌레의 박학 키재기에 입이 벌어진다. 무진장 다양하고 재밋는 '책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의 관심 끌기에 충분하다.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성경읽기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땅의 이치를 따라서는 납득되지 않는 산법이다. 당연히 면벽수행 결과로 얻어질 득도의 대상도 아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풀어지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다.

성경은 이런 방식의 표상들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존재와 공의와 사랑의 통치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무지 그 말끼를 알아들을 수 없는 비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글과 기록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라 하였고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을 전제하게 만든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안에 하나님이 은연중에 전제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감추시되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

물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분명히 자라간다. 많은 정보와 혜안을 얻는다. 그러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보다 중요하고 궁극적인 이유와 결과적인 열매는 믿음의 조상에게 말씀하신 약속대로 하나님 자신이 나에게 두려움을 소멸할 방패요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 이상의 달콤함을 제공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성경을 펼치지만 때때로 깊은 깨달음을 건지지 못할 때에라도 묘한 표만감에 잠기나 보다.

2012년 8월 10일 금요일

지식의 분량

경험되지 않은 것은 이성의 동의가 있었어도 아직 진정한 지식이 아닌 경우가 많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란 말씀은 전인격적 경험을 요구한다. 길이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라는 차원을 고려할 때, 지식이라 간주할 적정선 아래에 있는 앎이란 안다고 하면서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가식적인 앎'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필요가 있다. 이성의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스스로 속고 속이는 앎의 수준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 되는 차원까지 말이다. 자신과 타인은 모두 속았어도 유일하게 하나님만 속이지 못하는 은밀한 거짓이 마태복음 7장의 사례이다. 물론 구원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증언하는 대목이다.

지식의 '분량'이나 '정도'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시냇물을 찾는 사슴의 갈급함은 요원할 수밖에 없겠다. 복음을 듣고 믿었는데 그거면 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송이꿀 그 이상의 달콤함에 이끌려 일평생 그것만 추구하다 생을 마감하는 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고자 하지 않는 인생은 뭔가 중병에 걸려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은 이런 맥락에서 내 삶의 건강도를 진단해 본다.

에코의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움베루트 에코는 브랜드명 '미네르바' 성냥갑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을 정리하여 칼럼을 연재하곤 했는데 그것을 모아 출판한 책이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이다. 에코의 당일치기 글모음집 되겠다.

에코가 소개하는 '글을 잘 쓰는 37가지 방법'에서 잼나는 것은 '인용을 줄여라'고 하면서 '나는 인용을 증오한다. 단지 네가 아는 것만 말해라'는 에머슨의 글을 인용한 대목이다. '왜?'라는 칼럼은 '왜 성 바울로는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많은 여행 중에 만약 아내에게도 편지를 써야 했다면, 그만큼 [신약성서] 규모가 줄어 들었을 테니까' 류의 질문과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꼽을 잡게 한다. '우아하게 상스러운 말을 하는 방법'도 잼나는 표현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소장가치 없다. 기냥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후루룩 훓어보고 에코의 하루치 글쓰기의 가벼운 재치를 경험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인터넷 관련글은 생략해도 좋겠다...영 후져서~~~ ㅡ.ㅡ

하나님의 예정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 있다지만 정작 인간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진단이다.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없단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유일하게 알고 알게 하실 하나님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인간의 부패성은 그 규모가 측량되지 않아서다.

욥은 세 친구들의 신학적 능변을 능가하는 구약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로마서에 버금가는 진리의 규모를 세웠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택함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 그런 지각에서 근원적인 자기부인이 가능했다.

우리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적 상태의 심각성에 대해 무지한 그 만큼 그토록 심각한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무지한 거다. 이런 맥락에서 난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한다.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 근원을 소급하면 땅에서 펼쳐지는 가까운 원인 그 너머의 차원이 있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신 뜻을 따라 정하심. 바울은 그것이 선악을 알거나 행하기도 전에, 그리고 창세 이전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피조물과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변경할 수 없는 불변의 신적 작정하심 되겠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의 마음이 구원의 여부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극히 높고 의로우신 판단력을 따라 우리를 택하신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한 은혜가 없다. 피조물이 그 본성에 따른 자율성에 어떠한 강압이나 위협 없이도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그런 하나님의 정하심은 우리에게 가장 견고한 확신의 근거이며 가장 깊은 겸손의 샘이면서 가장 은밀한 은혜의 내용이다. 구원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 마음의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라면...아,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오싹한 일이다. 

비록 우리에게 택자와 유기자의 분별이 맡겨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이 작정과 예정의 신적인 신비를 적당한 분량만큼 노출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 확신에 거하게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합당한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깨닫게 하사 필경 일평생 감사의 행로에서 이탈하게 않게 하시려는 성경 저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신적인 인과율인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이 눈에 관찰되는 가까운 인과율을 따라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안력이 결코 미치지 못할 신비라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이 친히 가려두신 영역,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신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려질 수 있을 정도로만 적당히 노출하고 있다. 

당연히 신비라 할지라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 않은 이상 묵과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인간의 호기심을 따라 성경이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도록 가려둔 영역을 함부로 범하는 것도 금물이다. 호기심에 이끌려 선을 넘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미로에 빠진다는 칼빈의 경고는 빈말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비록 이성의 빛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택자와 유기자 구별은 이성의 빛으로는 조명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에게 맡겨진 심판과 정죄의 무기도 아니다. 나는 확신과 겸손과 감사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정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일에 어떠한 주저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