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2일 수요일

보나벨처 논리: 무에서의 창조

무에서의 창조(ex nihilo)에 대한 보나벤처 논법은 아래와 같다.

생산된 것보다 생산자가 선행하고 더 완전하다. 무언가를 행하거나 무엇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 주체는 보다 고상하고 완전하다. 그렇다면 가장 고상하고 완전한 것은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주체이다. 하나님이 그런 주체이다. 가장 고상하고 완전하다.

무언가를 생산할 때에 주체만 홀로 있는 상황이라 한다면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산출하거나 아니면 무에서 산출할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사물을 생산하진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주체가 무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무의 일부일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재물과 공의

재물은 진노의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우리를 건진다.

사물의 중요성은 죽음의 무게로 달아 보아야 제대로 가늠된다. 목숨을 걸고 집착했던 것들이 허상으로 확인되는 것보다 허망한 일이 있을까. '재물'은 그런 모든 허상의 총화를 가리킨다. 재물로 인하여 공의를 굽히는 것이 허상에 목숨을 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모든 세상사의 재판관은 주님이다.

뇌물이 통하는 현상은 세상의 이치를 가리는 가상이다. 뇌물은 어두운 돈의 뒷거래만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로운 공의를 망각한 모든 처사가 추한 뇌물에 머리를 숙이는 일이다. 범사에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의 뇌리를 파고드는 생소한 그러나 너무도 달콤한 무질서는 바로 뇌물이다. 이거 먹으면 반드시 탈난다. '무익'을 넘어 '유해'하다.

신앙의 피가 이처럼 일상의 혈관을 관통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매사에 믿음으로 산다. 삶의 전반적인 양태는 다 신앙의 소산이다. 원인과 결과 형식으로 확인되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믿음으로 산다'는 원리가 변경되는 건 아니다. 그 원리가 너무도 깊어 우리의 안목으로 잘 포착되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아무런 충돌이 없는 우리 편에서의 믿음은 삶을 해석하고 세상을 판독하는 키워드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씀은 기복적인 각도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리에서 이해하면 인생의 비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자. 그게 현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뜻) 의존적인 믿음대로 된다. 

Ames'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강연 모음집

William Ames, The Substance of Christian Religion: or A plain and easie draught of the Christian catechisme.

링크된 문헌은 신앙과 학문의 자유를 찾아 화란으로 간 윌리엄 에임즈가 프라네커 대학에서 수행한 52번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강연 모음집 되겠다. 여기서 에임즈의 방식과 목적은 교리문답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텍스트를 선택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설교적 전달을 통해 기독교 교리문답 밑그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여 문헌은 부드럽고 은혜롭다. 성경을 풀면서도 에임즈는 교리문답 각 항목의 주제를 능숙하게 포섭한다. 대륙의 교리문답에 대한 퓨리탄 주해라는 점도 이 문헌의 남다른 특징이라 하겠다. 1659년에 저술된 이 설교식 교리문답 강해집이 국어의 옷을 입고 서가에 등장하면 한국의 달구어진 교리교육 무드에 기름을 끼엇는 격이라 예상된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잠언이 좋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잠언 스타일에 매료된다. 통일된 철학적 체계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이나 그 개념들의 절묘한 조합으로 구축된 사상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잠언은 일상적인 용어에 지혜를 담되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지혜의 차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이 지나쳐 현실에서 멀어지는 일도 없고 구체가 과도해서 코앞의 현실만 관여하는 것도 아닌 적정의 지혜, 인간이 최고의 균형과 조화를 빚어내는 삶이 가능하게 하는 차원 말이다.

그리고 잠언은 내가 비워지지 않으면 내게 담아질 수 없는 지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내 안에 나의 주인으로 남아 있고서도 깨달아질 지혜를 잠언에서 찾는다면 허수고다. 하여 최고로 경건한 자기부인 연습은 잠언이 제공하는 지혜와의 씨름으로 실현된다.

또한 집중력과 추리력을 가동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시선과 의식을 사로잡는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리 잠언은 우리의 전인격을 힘써 몰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스타일로 기록되어 작금의 스크린 혹은 바보상자 시대가 부추기는 무신경과 무사유의 달콤한 유혹에 철퇴를 가하는 능력의 사색가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수고 없이 주어지는 깨달음과 즐거움과 정보는 효율성 면에서는 흠모할만 하지만 우리에게 우리의 정신상태 일반이 심하게 훼손되는 댓가를 납부하게 만든다. 때때로 편하고 효율적인 것이 속임수의 방편이 된다는 얘기다. 생각의 여백이 없는 게임이나 스크린은 자제해야 한다. 

우리 내면에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 자극되는 환경을 제공하는 건 부모의 몫이다. 그런 환경으로 피폐된 자녀들의 내면에 왕짜증 공법을 구사하며 다스리려 하는 태도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상처와 저항감만 기른다. 말씀을 읽히는 게 상책이다. 

2012년 9월 1일 토요일

말씀의 달인

성경을 읽다가 때때로 낯선 구절들과 만난다. 내 상황과 어떠한 접족점도 없는 내용들을 접할 때마다 솔직히 관심과 초점이 흐려진다. '주께서 헛다리를 짚으셨네.' 이런 불경한 생각과 더불어 내게 주어지지 않은 양식이라 여기고 중시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않았고 경험하지 않았고 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구절들이 내게 가장 긴요한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내 의식과 주의를 끌지 못하는 건 그 말씀이 쓸데없는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현상은 우리의 경험이 짧고 생각이 좁고 마음이 둔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모든 인생과 만물과 역사를 다 아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란 가장 기초적인 사실만 정직하게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우리가 생소하고 나랑 무관하게 보이는 말씀을 접할 때가 의식의 얕음과 경험의 왜소함과 사유의 빈곤을 인정하며 모든 부분에 있어서 지평을 넓혀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는 때다. 

원수들이 사방으로 우겨싸고 있어 주님만이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신다는 시인의 고백을 접할 때에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너무 평탄한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정직한 실상은 우리가 인생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아니라 우리가 헛다리를 짚는 인생을 산다는 증거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낯설고 무신경한 구절과의 만남은 전인격적 지평 확대의 호기다. 성경 덮지 마시라. 오히려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포착함이 마땅하다.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단어들을 알게 된 비결을 털어놓은 어떤 영어의 달인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책을 읽을 때마다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단다. '내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기만 해 봐라.' 해서 그는 그런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의미의 살쩜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그 단어의 뼛속까지 구석구석 발라 먹었단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의 만남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갈증을 지닌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사전이 되는거다. 이는 자연법에 해당한다. 

의미도 모르고 내용도 생소하고 써먹을 만한 구석이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 말씀을 만나거든 미친듯이 기뻐하며 꿀보다 더 달콤한 음식을 접한 듯 드시라. 세상은 지금 말씀의 달인들을 요구한다. 그런 분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