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4일 월요일

아침 부서미팅 설교

"나를 정결케 하는 속죄제"(레4:1-21)

1.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하나님의 계명에는 차별이 모두 중요하다. 모든 계명의 주어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계명의 종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명을 범한 자들의 신분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대목이다. 제사장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법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2. "제사장...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이스라엘 온 회중...수송아지를 속죄제로...": 제사장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에 바치는 속죄제의 제물이 동일하다. 제사장은 성전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회중의 영혼을 관리한다. 소위 영적 지도자다. 그들의 타락은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과 맞먹는다. 그만큼 섬김의 내용이 중하고 섬김의 대상이 중다한 자에게는 책임의 무게도 거기에 비례한다.

3.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양태들 중에 지각 밖에서 벌어지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랐다"는 것이 계명의 위반을 무마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무지나 망각으로 핑계하지 못한다. 알든 모르든 의식하지 의식하지 못하든 죄는 죄다. 그래서 경건한 다윗은 "숨은 허물"까지 깨닫게 해 달라고도 했다.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한국교회 정보제공

한 지역이나 도시의 교회 수나 이름이나 주소나 교단이나 담임목사 이름이나 연락처나 주소를 파악하기 위해 유용한 사이트다. 현재 내가 거주하고 있는 전북에는 2000여개의 교회가, 전주에는 700여개의 교회가 있다.

한국교회 현황

2016년 3월 28일 월요일

고백의 향기 그리고 다짐

오늘은 아들의 입술에서 목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오늘 요한복음 전체를 읽었단다. 읽으면서 성경은 사람의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의 필치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느꼈단다. 난해한 부분은 밑줄을 치고 집으로 와서 나에게 물었다. 깊은 이야기도 들을 준비가 된 아들에게 난 친절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요한복음 전체를 읽으면서 깊은 의미가 마음을 후비니까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죽겠단다. "목회하고 싶은 마음이 이런걸까?" 아들의 입술에서 출고된 독백이다.

아들에게 제일 특이했던 부분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구절의 성취이다. 그렇게 오래 전에 예언된 말씀이 어떻게 먼 훗날에 예수님께 성취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말하며 아들은 참으로 놀랍다는 감탄사를 쏟아낸다. 나에게는 아들이 놀라웠다. 오랫동안 신학을 권하고 목회자의 길을 권했으나 신학에 대해 공부는 하겠지만 목회자의 길은 아니라며 늘 완강한 거절의 손사래로 응수했던 아들이다. 그런데 그런 아들의 입술에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줄줄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권면의 선을 넘어 강요까지 가지 않아서 감사했다. 한 사람의 길은 비록 부모나 당사자가 정하여도 그 걸음의 인도는 주님의 주권적인 몫이라던 지혜자의 말이 미소짓는 야밤이다. 오늘은 하루의 끝자락에 이르러도 피곤함을 모르는 향기로운 날이었다. 감사하다...

내일부터 끼니를 전도의 방편으로 삼으련다...

혀가 입천장에..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지 않을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찌라(시137:6). 교회를 향한 나의 사랑도 이렇게 표현할 경지까지 이르기를...

나의 솔직한 기쁨은 어디에 있나? 교회여야 하는데 그러한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성향의 사람이고 싶다...주여 도우소서. 구체적인 교회로서 지금은 전주대를 그렇게 사랑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의미의 균형

"가난해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28:6)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곧장 "부하면서 성실하게 행하는 자"를 생각한다. 가난과 성실의 묶음을 부와 행악에 대립적인 사안으로 보지 않고 절충하면 더 좋다는 발상이다. 어쩌면 이는 성실에 부까지 더하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덧셈의 유혹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사유는 늘 이런 식이다. 성경보다 지혜롭고 싶어한다. 동시에 성경의 기록에는 우리로 하여금 보다 깊은 사색으로 걸음을 옮기도록 초청하는 자발적 학습의 의도도 있다. 율법도 행위의 하한선을 규정한 것이지 "의와 인과 신"이라는 보다 깊은 의미까지 이르라는 주님의 가르침도 있지 않은가. 성경의 표현에 머무르는 것과 성경 전체가 허용하는 의미의 부요함 사이에 적정한 균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