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주님의 과격한 어법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마5:29)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재해석 끝자락에 등장하는 처방이다. 실족을 유발한 오른손의 제거도 같은 맥락에서 언급된다. 등골이 오싹하다. 내용의 과격성 탓이기도 하지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입법자 자신의 어떠한 사족도 불허하는 최종적인 유권해석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로 인해 교부들도 해석의 골머리를 앓았다.

어거스틴 해석에 의하면, 눈은 관상(contemplatio)을, 손은 행위(actio)를 가리킨다. 다르게는, 눈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듯이 고언을 제공하는 친구도 그렇다는 이해에 기초하여 오른눈은 천상적인 사안에 조언을 제공하는 친구이고 왼눈은 지상적인 일들을 돕는 친구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해석 가능성은 상실의 두려움이 가장 큰 최상위의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 바로 눈의 의미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고 유가치한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높아서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이 본문의 핵심(in summa)이라 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절단도 불사해야 한다는 건 예수님의 본의가 아니고 어법의 과장된 형태(hyperbolice)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주님께서 그런 과장법을 사용하신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에 무제한적 방종(effraeni licentia)를 과도하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눈과 손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명령을 받들어 수행하는 기관이다. 지각과 행위의 수단들이 우리로 범죄케 한다면, 수단의 제거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의 용도를 거머쥐고 있는 우리의 본성을 틈탄 죄를 제거해야 방지되는 사안이다. 이건 원론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음심과 음행의 예방책은 부부간의 깊은 사랑이 유일하다. 독신의 길을 선호한 바울도 음행의 연고로 남편과 아내를 두라는 해법을 제안했을 정도다. 음심과 음행의 온갖 유혹을 무력하게 만드는 건 부부애다. 타인이 아무리 신사적인 매너를 갖추고 요염한 눈빛을 흘려도 부부애가 깊으면 모두 뻘짓으로 처리된다. 잉꼬커플 주변에는 남의 떡에 군침 흘리는 파리들도 알아서 피해간다. 그렇다고 닭살 수준까지 갈 필요는...으흠!!

주님께서 유독 음행의 문제에 과격한 어법을 구사하신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하면 우리를 끼니로 여기는 유혹의 파리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평소에는 거뜬히 뿌리치던 초등 유혹의 허술한 추잡에도 코뚜레가 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음행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눈이 주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하고 손이 다른 것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신랑되신 주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다. 가장 소중한 우리의 눈동자라 할지라도 주님과의 밀착을 방해하면 포기해야 할 정도로 놀라운 복이다. 주님과의 단절을 지옥이라 한다면, 당연히 지옥에 던지우지 않으려는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저항은 주님과의 연합이다. 깊은 신뢰를 구축하고 깊은 묵상을 추구하고 깊은 사랑의 연합을 도모하는 것이 별거 아닌 듯하여도 그게 참으로 위대한 축복이다. 나의 가장 소중한 오른눈을 포기해도 될 만큼...

이런 가치의 성경적 우선순위, 낯설게 느껴진다. 말씀에서 멀어진 상태의 방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실제로 신체의 물리적인 제거를 해법으로 시행하는 이슬람 방식을 취해서는 아니된다. 칼의 위협이 물리적인 억제력을 발휘할 수는 있겠으나 사람의 영혼을 바꾸지는 못해서다. 음행의 눈과 손을 제거하는 방식은 성령의 검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교회는 경찰력이 사용하지 않는다. 세상 법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법의 입법자와 심판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죄인의 자리인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에 스스로 오르시는 방식이 우리의 지혜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음탕한 눈과 부끄러운 손이 되셔서 스스로 버리운 바 되신 십자가의 기독교는 정말 무서운 종교다. 그런데 신자도 불신자도 무서운 줄 모른다...그래서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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