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3일 월요일

자기노출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을 퍼뜨린다(잠13:16)

한 사람의 행실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법이다. 지혜자는 다른 곳에서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보인다"(잠20:11)고 했다. 내게서 나간 모든 것들이 나를 고발한다. 무엇을 말하고 어떠한 것을 행하여도 노출의 일차적인 내용은 말과 행위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말과 행위의 당사자다. 다양한 것을 말하고 다양한 이들에게 무엇을 행하여도 이를 통하여 알려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삶은 말에서나 일에서나 자기 노출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퍼뜨리고 미련한 자는 미련을 퍼뜨린다. 내게서 나오는 내용물은 조작의 대상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의 옷을 입히고 거짓된 선행으로 가려도 변경되지 않는다. 미련한 자에게서 미련 이외의 것이 나올 것이라는 야무진 기대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의 소산이다. 마음에 쌓인 것이 미련이면 그것을 입술로 출고하든 행위로 발산하든 어떠한 형식으로 배설하든 내용물은 미련이다.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한다. 입술을 과하게 열어 미련을 대량으로 살포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다. 충분한 분량의 미련을 쏟아내지 않으면 직성이 견디지를 못하는 고집스런 습성, 그게 다 자신의 모습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면 어떠할까?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전1:25)고 말한다. 최고의 지혜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의 달인으로 발견된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기에 급이 다르단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은 마땅하다. 게다가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오고 허물도 많아진다. 그러니 그나마 침묵이 상책이다.

어디에나 말들이 많다. 미련한 아우성의 과잉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타인에 대해서 말하는데 대체로 자신의 미련을 퍼뜨리는 형국이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 내가 옳아지는 게 아니고 타인의 무지를 고발하면 나의 박식함이 입증되는 게 아니고 타인의 경박을 꼬집으면 나의 언행이 진중하게 여겨지는 게 아니고 타인의 헐렁한 기준을 꼬집으면 나의 엄밀한 수준이 드러나는 게 아니며 타인의 부패를 정죄하면 나의 의로움이 확보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빚어진다. 타인의 무언가를 재보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어떠함만 노출한다. 그런데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고발하는 것보다 덮어주는 것이 지혜롭다. 무엇보다 자신의 미련함을 주 앞에서 수습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급선무다. 공이로 찧을지라도 벗겨지지 않는 자신의 미련함과 직면하면, 타인의 못난 모습을 꼬집고 까발리는 방식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본보이는 방식이 더 우월하고 유효함을 지각하게 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않으신" 주님처럼 사랑과 용서가 언제나 우선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판단의 칼을 잡을 때에는 사랑하는 만큼 휘두를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정의의 어떠한 구현도 의로움과 무관하다.

인간의 미련함은 천박하고 유치한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고상한 이름으로 고상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그래서 미련을 미련으로 알지 못하고 표출을 중단하지 않는 부작용도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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