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0일 금요일

신성의 모든 충만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2:9)

교리의 체계화에 대한 공교회적 움직임에 뾰족한 촉매가 되었던 알렉산드리아 장로 아리우스 사상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가 피조된 존재라는 것이었다. 즉 성자는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있었고 실체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하지 않다는 그의 주장은 4세기 초반을 신학적 격동의 시대로 내몰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 주장에 편승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와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교회가 확립한 첫번째 공교회적 교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이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실체를 가졌다(ὁμοούσιος)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창조의 결과였다. 예수님에 대한 아리우스 장로의 이해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육체에서 출발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에서 말미암지 않았다는 바울의 인식론이 존중되지 않았다. 아리우스 장로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사실 바울도 초기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육체로 대하였다. 그런 관점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적용되어 성도들도 육체로 알았다고 바울은 자백했다. 그러나 이성이 거듭난 이후에는 육체로 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눈을 열어서 확보된 지각에서 이해가 시작되는 우리의 인지적 한계를 과장하고 과신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단추구멍 사이즈의 눈이 제공하는 뿌연 시야에 다 담으려고 심지어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도 임의로 변경하고 어거지로 거기에 구겨 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는 눈이 얼마만큼 보아야 사물의 객관성에 도달할까? 듣는 귀가 얼마만큼 들어야 정보의 객관성에 도달할까? 만물의 다양성과 소리의 중다함과 우주의 광대함 앞에 우리의 눈과 귀가 감지하는 영역이 얼마나 된다고 자신의 지각을 진리의 잣대로 추앙하고 판단의 보좌에 앉히는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면, 들리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 것이 많다면 눈과 귀가 조달하는 정보에 의존하면 할수록 주관적인 것이고 어리석인 일이다. 최소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의 머리는 그분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예수님은 "신성의 모든 충만(πᾶν τὸ πλήρωμα)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시다. 완전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이것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할 방법이 또 있을까?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식 표현으로 바꾸면 "신성의 모든 충만"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성에 있어서 완전한 하나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도 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바울의 종합적인 그리스도 이해였다. 보다 많이 보다 멀리 보다 크고 보다 작은 세계를 목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바울의 이러한 이해가 상대화될 수는 없다. 문명의 진보란 고작해야 보고 듣는 정보의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확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부요하게 증거되고 존중된 시대가 역사적 진보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발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완전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올바른 그리스도 이해 없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없다는 이야기다. 주님을 모르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온전함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성경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그리스도 이해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도 왜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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