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2일 목요일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

우리는 모두 땅에 거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바울은 삼층천 출입자다. 구약에 대한 지적 전문성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최고의 석학이다. 다른 사도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량과 수준의 학식을 구비한 인물이요 구약 전문의 완벽한 암송자요 출중한 내용 전달자다. 나아가 몸으로 계셨던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배운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게 3년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사도였다.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과 시공간 안에 있는 피조물과 역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바울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도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을 희미하고 부분적인 것일 뿐이라고 공언했다. 질과 분량에 있어서 바울에 비해 현저히 빈약한 지식의 소유자인 우리는 어쩌라는 말인가!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발언은 겸양의 수사법 구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꾸며지지 않은 시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교정한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을 즉각적인 취득이 아니라 매개체를 통하여 취득한다. 그 매개체가 바로 "거울"이다. 그러니까 거울은 방법이고 지식은 내용이다. 사용하는 거울의 투명도에 따라 취득되는 지식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 거울들 중에는 유리로 된 거울도 있고, 빛이라는 거울도 있고, 역사라는 거울도 있고, 고전이란 거울도 있고, 사람이란 거울도 있는데 자기 자신도 그런 거울들 중에 포함된다. 택하는 거울의 종류에 따라 거기에 비추어진 지식의 차원도 달라진다. 물리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빛과 유리로 된 거울이 필요하고, 지금의 객관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지나간 역사와 고전의 거울이 필요하고,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과 자신이란 거울이 모두 필요하다.

세상의 지식만이 아니라 기독교적 진리의 취득을 위해서도 필요한 최고의 거울은 단연 성경이다. 성경의 거울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지식의 질과 분량은 우리의 육안이나 빛이나 타인이나 고전이나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것과는 판이하며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월등하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든, 천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사회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최고의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요 거울이 있다면 바로 성경이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을 기독교 진리가 주어지는 원리이며 원천이라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을 통째로 암송했고 성령의 감동까지 받은 사람인데 자신의 지식을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일 뿐이라고 한다.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자. 바울의 고백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취득할 수 있는 지식은 희미하고 부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의 취득은 지극히 정상이다. 희미한 것인데도 선명하게 안다거나 부분적인 것인데도 전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수상하다. 주로 이단들이 합당하고 정상적인 무지를 비웃으며 그것을 포교의 틈새로 활용하고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을 미끼로 투척한다. 그들의 전략은 주로 '요걸 몰랐지'다. 하나님의 신적인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바울 자신도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보다도 더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은 최소한 이 땅에서는 정상이 아니다.

이 땅에는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주어지지 않는다.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에 만족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전체를 말하지 않고 어떤 부분만을 말하고 침묵한다. 그 침묵의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설정한 지식의 지계표를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도록 계시된 성경의 기록에 대해서도 무지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무관하다. 성경의 가르침에 눈길도 주지 않는 무관심과 성실하지 못해서 무지에 머물게 된 게으름에 인식론적 면죄부를 발부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앎의 경계를 넘으려는 당돌한 시도보다 그런 경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 의도 파악에 관심을 요청하고 싶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의 희미함과 부분성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중요성, 특별히 사랑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희미하게 알고 부분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항상 있어야 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발휘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아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안다는 지식과 사랑의 선순환적 연관성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식의 선명함과 희미함 사이의 간격, 그리고 부분성과 전체성 사이의 여백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매운다는 그런 연관성에 주목하고 싶다. 이 땅에서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으로 채워진 자에게는 적정한 희미함과 부분성을 가진 사람과는 달리 미지의 대상을 추구하는 믿음과 소망이 비집고 들어갈 빈공간이 없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치가 생산되는 독특한 현장이 바로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이다. 완전한 지식을 확연하게 안다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고 완전히 알게 되는 그 때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하지 않다. 이 땅에서의 사랑도 나 자신의 인격과는 무관하게 나온 완전한 지식의 기계적인 배설물일 뿐이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얻는 완전한 앎이 비록 땅에서의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곳에서 이루어질 놀라운 가치와 의미가 생산되는 천상적인 희미함과 부분성은 여전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때가 이르러서 새하늘과 새땅에 가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에는 이르지를 못해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연과 역사는 물론 성경을 읽을 때에라도 거울을 보는 듯한 희미함과 거울이 담아내는 부분성을 존중하되 자연과 역사와 성경에 계시된 정도의 적정한 희미함과 부분성에 최대한 이르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도리이다. 이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장 화려하게 꽃피는 현장은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29장 29절의 말씀도 이러한 이해를 돕는다. 거기서는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을 구분하고 전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후자는 우리에게 속했다고 모세는 진술한다. 나타난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고 오묘한 일의 협조가 없다면 나타난 것은 희미하게 아는 지식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이겠다. 동시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인격적 학구열 발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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