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8일 토요일

미완성과 미취득의 삶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3:12)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얻기 위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으며 심지어 해로운 것이라고 진술했다. 로마의 태생적인 시민권자,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 최고의 문벌 가멜리엘 학파의 문하생, 교계의 질서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구별된 선민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 앞에서의 무흠자, 이 정도면 당시의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 할 유용한 스팩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스팩을 무익과 악취와 혐오의 대명사인 배설물에 불과한 수준으로 격하시켜 버리다니! 어찌 사회적인 반향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가치의 이러한 반전에 사회 전체가 술렁거릴 정도였다. 이는 조금 다른 문맥에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는 총독 베스도의 말에서도 얼추 느껴진다. 이는 만약 바울이 미치지 않았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어법이다. 

모든 사랆들이 그렇게도 흠모하는 유익들을 배설물과 가볍게 동일시한 사고의 배후에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얻겠다는 바울의 일념이 문맥에서 읽어진다. 그렇다. 바울의 가치를 조정하는 저울추는 그리스도 예수였다. 그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댓가로 지불할 용의가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을 정도였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주변의 평가는 전혀 과하지가 않았음이 확인된다. 진실로 바울은 예수에게 미친 사도였다. 사실 그것이 진정 사도의 사도다운 최상급 면모였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갈증 때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유혹의 떡밥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바울의 그 자유는 어떤 경지일까? 사실 숨통이 밤의 경점 단위로 끊어질 어떤 위인에게 사로잡혀 있어도 누려지는 자유와 기쁨은 상상을 불허하지 않던가. 이단들이 이런 것을 제대로 악용한다. 교주에게 올인하는 순간 교주의 경지가 자신의 경지가 되는 듯한 자유의 가식이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그를 추종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그러나 교주 따위의 인간 군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바로 바울이다. 답답한 속을 뚫어주는 술이 제공하는 자유는 고작해야 무절제한 고성방가, 노상방뇨, 주접떨기 수준이다. 법의 울타리를 마구 넘나드는 권력과 부와 명예가 주는 자유도 술취하는 수준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이는 모두 후회가 곧장 엄습하고 수치와 민망으로 인해 면상에 온도의 급상승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공하는 자유는 질적으로 다르고 정도에 있어서도 격차가 현저하다. 예수님은 진리시다. 사로잡혀 있어도 결박이 아니라 자유가 되는 것은 진리가 유일하다. 그래서 진리만이 "자유"라는 말의 사용이 용인된다. 진리만이 아니라 무한대의 사랑과 거룩과 의와 지혜와 지식과 선하심의 원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결박되면 될수록 그의 무한한 최고급 자유가 자신의 것으로 주어진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어떠한 사물도 비록 모양새는 "자유"를 제공하는 듯하나 이내 "중독"과 "속박"의 촉수로 둔갑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유익을 위협하고 저해하는 모든 것들을 단호하게 배설물로 여겼다. 그런 단호함의 반대편에 그가 향유한 자유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가 대충 느껴진다. 온갖 종류의 보화가 다 담긴 그리스도 예수의 전인격이 진실로 바울이 누렸을 자유의 경계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과히 무한대의 자유였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이러한 자유를 맛 본 자에게는 아무리 막대한 땅에서의 지상적 자유를 약속한들 무슨 유혹이 되겠는가! 죽음도 그를 결박하지 못하는데 그 어떤 것이 그를 묶는 유효한 족쇄일 수 있겠는가! 예수의 존재와 사역,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달리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않고 자랑치도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에게 먹힐 미끼가 과연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는 이런 것이다. 결박할 끈이 없어지는 자유이다. 그런 자유 앞에서는 아무리 끈적한 유혹도 일곱 길로 도망한다. 종국적인 것으로는 죽음에의 종노릇 행보를 중단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자유는 날개를 단다.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행보를 막을 다른 대체물은 없다.

바울의 정신세계 안에 또 하나의 도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아직 얻지도 않았으며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는 항구적인 정진의 자세이다. 이는 이렇게 해석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는 것은 이 땅에서 일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인 동시에 그러한 추구 자체가 이 땅에서의 삶이라는 거다. 바울은 정말 못말리는 위인이다. 무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을 득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완성과 완취가 불가능한 경주란다. 앞만 응시하며 질주해야 할 푯대란다. 그러나 비록 완성하지 못하고 온전히 가지지도 못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고작 맛보기만 주어져도 인간의 상상 그 이상의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푯대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나그네의 삶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얻었다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삶이었다. 완주해서 실증이 나고 다른 푯대를 찾아 헐떡여야 하는 그런 일회성 푯대가 아니라 아무리 누리고 성취해도 더 큰 갈증을 유발하는 신비로운 푯대를 지향하는 삶이었다.

바울이 고백하는 영속적인 미완성와 미취득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완전히 사로잡힌 삶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그에게 심히 매료된다. 하늘에서 이루어질 완성과 취득을 더욱 고대하게 되는 점증적인 갈증유발 일로를 걸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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