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6일 금요일

자유의 과잉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왕의 부재와 개인의 자율성은 비례한다. 통치자가 없으면 당연히 외부의 강요와 억압과 통제도 사라진다. 여기서 "왕"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일반적인 권위 일체를 일컫는다. 규범이나 예절이나 상식이나 관습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교훈이나 제도나 질서나 다수결 혹은 심지어 지식과 경험조차 권위의 다양한 얼굴이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자유에 막대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자신의 생명이 수단화될 정도로 자유에 대한 열망은 참으로 대단하다. 자유의 수호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자살도 불사한다. 그러나 만약 자유의 개념이 왜곡되어 있다면 무서운 종노릇의 끔찍한 희생물로 전락하고 만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견에 옳다고 판단하는 대로 살아간다. 세상에는 이것이 자유의 보편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자유는 통치와 지배와 억압과 통제를 상징하는 "왕"의 부재를 요청한다. 그래서 "왕"의 권위적인 숨결이 느껴지는 어떠한 것도 거부하고 부정한다. 통치자의 권위도 부정하고, 통치하는 그룹이 만들어낸 규율도 부정하고, 그런 규율이 체질화된 관습도 거부하고, 규율이 제도의 옷을 벗은 주류 문화도 거부하고, 부모와 스승의 권위도 거부하고, 성을 구분하는 남녀의 생물학적 경계도 무시한다. 자신이 옳다고 하는 자기의 소견 이외에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드물게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의 소견과 일치하는 경우이다.

사실 사람들은 세상의 일그러진 질서 속에서 신물이 나도록 개인적인 모순과 사회적인 부조리를 경험했다. 부당한 규정과 편파적인 판결에 염증이 났다. 어두운 물건을 뒷문으로 거래하고 고급한 정보는 측근에게 빼돌리고 사회적 시스템의 정상적인 작동을 입맛대로 조작하고 생존의 경제적 위협으로 순응을 강요하는 야비한 권위의 파행적인 남용이 우리의 고귀한 삶을 분노와 좌절로 얼룩지게 했다. 권위의 부정은 어쩌면 권위 자체의 부정보다 권위의 과잉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세대가 이전 세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음도 무작정 후세대의 무례로만 돌릴 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볼 계기로 여김이 더 합당하다.

과잉의 경계선은 대체로 외부의 어떤 권위가 나의 소견과 충돌되는 바로 그 지점이다. 문제는 나의 소견도 과잉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인생이 아니라 부모의 기호를 따라 꼭두각시 인생을 살았다고 여기며 부모의 모든 흔적을 나에게서 지우려는 것, 사회의 기대와 가치의 프레임에 갇혀 죄수처럼 살았다고 여기며 일체의 사회적인 규범과 관행을 배척하는 것, 교회문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벌어진 교리의 주입을 종교적 폭력으로 여기며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허울이나 악으로 여기는 것 등은 개인적인 소견의 과잉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게다가 부모와 사회와 종교가 준 그동안의 유익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속아준 것으로도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한다.

맞다. 우리는 잘못된 권위의 횡포로 오랜 시간동안 신음하며 살아왔다. 권위의 부정과 배척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그러나 부당한 권위의 제거와 개인적인 소견의 과잉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은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자존적인 전능자가 아니다. 참으로 연약하다.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더 연약한 사람들도 있다. 그분들은 어떡하나! 자기의 소견이 권위의 요체라는 주장이 나에게는 마치 연약한 자들은 죽으라는 묵언으로 들린다. 이는 마치 자신의 소견이 자신의 존재와 생존을 지탱해 줄 정도로 강하고 출중하고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내 알 바 아니라는 적자생존 법칙이다. 약자는 종교나 도덕이나 규율이란 아편을 맞으며 살아가고 강한 자에게는 그런 따위들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 입장은 이렇다. 나에게는 왕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보다 뛰어난 왕이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높낮이가 없다. 모두가 동등하다.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왕으로 군림하는 것은 일체 거부한다. 어떠한 도덕과 규율도 나는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에게는 유익한 권위시다. 그분이 설정한 질서만이 나에게는 규범이다. 개인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회와 국가와 시간과 자연의 다양한 질서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만큼의 권위만 인정하려 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를 나의 소견보다 더 행복하고 유익하게 하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그분의 자녀요 벗이요 종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요 행복이요 영광이다.

나보다 못한 것들이 휘두른 권위의 횡포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인정해야 할 권위까지 거부하며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우매함과 불행이다. 게다가 그런 상태를 자유의 극치라고 여기며 도무지 헤어나올 마음과 의식조차 없으니 더더욱 애달프다. 성경은 왕의 부재를 불행한 무질서로 간주한다. 이는 진정한 왕의 부재로 인해 무수히 많은 종류의 그릇된 왕들이 진정한 왕의 공석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무소불위 자유를 원했으나 속박이 대체하는 격이다. 자유의 과잉은 속박의 다른 얼굴이다. 최고의 존재를 나의 왕으로 모실 때에 비로소 가장 완전한 자유를 구가함은 만인의 상식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왕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나의 주인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괜찮치가 않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최고의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에 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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