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6일 목요일

믿음의 취득도 은혜이고 보존도 은혜이다

믿는다고 해서 믿는 게 아니다.
저마다가 믿는다고 생각되는 다른 기준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서 온 것을
비유가 아니라 밝히 말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지금은 밝히 말씀하니 우리가 믿나이다' 그랬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며 긍정하는 듯하면서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는 반전의 언설을 쏟으셨다.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아리송한 표현과 함께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속성이 있음을 경계한 바 있다.
안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를 속이는 경우가 되겠다.
믿는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를 속이는 경우는 왜 없겠나?
제자들의 모습이 가장 명료한 사례를 제공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름에 있어서 그들의 믿음에 어떠한 의문도
제기할 수 없는 예수님과 가장 밀착된 측근 중에 측근이다.
그런 그들이 믿었다고 하면 의심할 수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각자의 확신을 믿음으로 보시질 않으셨다.
이런 게 힘든 부분이다. 나의 믿음조차 내가 믿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좀 안다고 교만할 거 없다.
믿음에 대한 불굴의 느낌이 들더라도 자만할 거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은혜요 기적이며
그 믿음이 보존되는 것도 은혜요 기적이다.

우리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물론 그 구원은 지속성과 영구성을 가졌다.
그러나 지속성과 영구성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생략되면
결정론과 같은 앙상한 공식 뼈다귀만 남는다. 대단히 큰 함정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결코 잊거나 버리지 않으시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영원하고 견고한 은혜를 그런 방식으로 증거하고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와 의미를 망각하면 '구원'이라는 미끼에 걸려
본질적인 것을 다 상실해도 그 이유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격이다.

하나님의 자존하심 외에 저절로 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지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믿음도 구원도 공식을 따라 한번 취득되면 상실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지식에 중독되지 말고 취득과 보존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누군가가 그것을 붙드시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 믿음이 지금도 보존되는 것은 그것을 붙드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의 The Last Word: Scripture and the Authority of God를 읽고

이 책에서 라이트는 성경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의 권위를 논한다.

특별히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1. 처음에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권위적인 것이었나?
2. 성경은 어떻게 합당하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가?
3. 합당하게 이해된 성경의 권위는 교회 자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성경의 권위(authority of Scripture)'라는 말이 기독교적 의미에서 정당성을 얻는 것은 그것이 '다소 성경을 통해 발휘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triune God, exercised somehow through scripture)'를 가리키는 축어로 이해될 때이다(p.23). 하나님이 모든 권위의 출처라고 바울은 말한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속한 그 모든 권위가 자신에게 주어졌다 말씀한다. 권위는 기록된 성경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기록된 성경의 권위'라는 말은 성경에 직접 등장하는 용어도 아니라는 얘기다. 

성경은 하나님, 예수님, 세상과 우리들 자신에 대해 놀라운 진리를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적인 양식을 따라 서술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융합시킨 하나의 스토리(story)로 가장 잘 표상되고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면 어떠한 것도 얻지 못한다고 라이트는 강조한다(p.26).

'성경의 권위'는 교회의 사명, 성령의 역사, 미래의 궁극적인 소망, 그것에 대한 현실의 기대, 교회의 본질 등과 같이 다양한 주제들의 한 가지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문제는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목적 전체를 완수함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느냐다. 성경은 정보를 전달하는 단순한 계시(simply revelation) 이상이며, 하나님의 자기소통(divine self-communication) 이상이며, 계시의 기록(record of revelation) 이상이다(p.30). 

하나님은 단순히 땅주인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분이시며 심판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이 자신의 계시라고 할지라도 온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역이란 문맥 안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권위라는 말은 그것을 하나님의 왕국이란 맥락에서 이해하면 정적인 권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단다. 즉 권위는 창조부터 심판과 회복에 이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다(p.33). 

왕국과 관련해서, 라이트는 그 왕국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민족(Scripture-hearing people), 즉 부르심, 약속, 해방, 인도, 심판, 용서, 후속적인 심판, 새로운 자유, 새로운 약속 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민족이며 이러한 일련의 표현들이 구약 내러티브 전체의 요약으로 보았다. 즉 구약은 단순한 계시의 기록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말이다(p.39). 

성경적 권위의 완전한 기독교적 가르침의 뿌리는 이렇다. 즉 그 뿌리는 사명을 가진 공동체의 토양에 견고히 심겨지고, 하나님 왕국이란 소식을 가지고 세상의 권세들과 맞서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활력을 얻고, 사도들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자라나고, 인간적인 삶의 변혁에 있어서 열매를 맺으며 이것은 다시 온 우주를 회복하고 갱신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에서의 권위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변형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따라 만들어진 공동체며, 복음의 '말씀'을 그 충만한 차원까지 듣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초기의 교회는 구약에 기록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체화되고 온 세상에 공표되고 교회에 가르쳐진 하나님의 강력하고 유효하고 권위적인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생존하게 된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다(50).

성경의 권위에 대한 기존의 건강한 이해는 성경을 통하여 백성들을 믿음으로, 거룩으로,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면, 성경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왕국이 잉태되는 수레라는 역동적인 개념을 놓쳤다는 것이다. 성경을 겨우 진위를 가리는 법정의 권위와 개인의 경건을 배양하는 사적인 권위로만 활용해 왔다는 것이 라이트의 진단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성경의 권위를 이해하되, 성경을 통하여 새로운 언약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을 교사와 설교자로 세우셔서 온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도래하게 하는 강력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통치로 이해하려 한다(p.64-65).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라이트는 '극좌'와 '극우'의 기우뚱한 독법을 십여 가지 이상 열거한 이후에 '신선하고, 왕국 중심적인, 역사에 뿌리를 둔 해석'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1) 전적으로 문맥적인(totally contextual), 2) 예전에 기반을 둔(liturgically grounded), 3) 개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privately studied), 4) 합당한 학문연구 충전을 받은(refreshed by appropriate scholarship), 5) 교회의 인정된 지도자에 의해 가르쳐진(taught by the church's accredited leaders) 독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p.127).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왕국을 온 세상에 세우도록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인도하고 강하게 무장하는 열쇠이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무엇보다 그 자체가 예배의 행위여야 하며, 하나님의 총체적인 이야기와 능력과 지혜와 하나님의 아들을 축하하는 행위여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고 변혁되고 그 본연의 하나님 왕국 세우는 사명을 지향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예배라고 라이트는 강조한다. 

권위에 있어서 성경과 전통과 이성은 다른 소스가 아니다. 성경이 늘 중심이며 하나님이 주시고 성경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이성은 교회로 하여금 성경의 명시적인 진술들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p.80).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왕국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믿음의 선진들과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확인의 기억이다(p.104). 

본서는 성경의 정적이고 평면적인 이해에 안주하는 자들의 노곤한 상태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이 버쩍 들게 하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전 우주적 역동성을 개인의 구원과 경건에만 제한하는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의 다소 '옹졸한 개인주의 성향'을 지적하며 하늘과 땅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긴 성경의 무한한 넓이도 강조한다. 진리가 기록되어 있기에 획득되는 법정의 진위 판권결이 성경의 권위가 아니라 성경을 모든 권위의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권위가 발휘되는 수단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통찰력도 간과할 수 없는 본서 일독의 유익이다. 

그러나 아쉬운 면도 없지는 않다. 지면에 좁아서 그런지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학적 특징을 싱겁게 다루고 말았다. 논지에 맞는 조각을 뜯어서 활용한 필요에 따른 인용의 흔적이 여기저기 발견된다. 그리고 '모든 성경은 문화적으로 조건지워 졌다(All scripture is culturally conditioned)'는 말과 그리스도 신성론도 문화적으로 조건지워 졌고 이신칭의 교리도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결과'라는 말은 보다 충분한 부연설명 없이는 위험한 발언이다(p.128). 자칫 성경과 그것의 가르침을 문화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약속과 성취라는 역사 전체의 한 시점을 문화로 간주하는 라이트의 신중한 표현이 없지는 않지만 인간의 역사적 문맥과 단절적인 진리의 계시가 성경에 등장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도록 안전을 위한 언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라이트 자신도 그런 부분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 

그리고 성경의 개인적인 해석 권한에 대한 퓨리탄의 강조가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주인이며 자기 영혼의 선장이라 주장하는 18세기 합리주의 사상으로 진입하는 길을 닦았다는 주장도 보다 정밀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라 사려된다(p.80). 하나님의 왕국 성취와 관련된 성경의 권위 이해가 과거에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라이트의 과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라이트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이란 개념에 성경해석 전체를 위탁한 경우는 드물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왕국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어거스틴, 아퀴나스, 칼빈, 코케이우스, 오웬, 퍼킨스 등의 인물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라이트를 읽을수록 느끼는 것은 라이트의 글이 어떤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겨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신론과 이단들과 보수적인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과 경향화된 신학들 모두를 두루두루 의식하며 글을 쓰기 때문에 그런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고려할 때에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에 비추어 그 경계선을 벗어난 부분에 냉혹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그리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자와 무관하게 진리를 왜곡하고 그것이 성도들의 판단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부분까지 침묵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동시에 유명하고 잘 나가는 분일수록 그 자리에 걸맞은 비판의 강도가 사방에서 가해지는 것은 당한 것이라고 여기며 각오하는 것이 저자 자신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향력이 크면 그에 따르는 견제도 그것에 버금가는 법이니까.

브루니의 추천도서

그는 인문주의 학자로서 바질의 헬라어 문헌, De utilitate studii in libros gentilium (이방인 문헌들에 대한 연구의 유용성에 대하여, 1403) 을 라틴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이 번역본은 인문주의 학자에 의해 번역된 최초의 헬라교부 텍스트다. 번역 이유는 교부들의 권위 있는 입술을 빌어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는 성경과 교부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인문학은 필수라고 믿는다. 그러나 브루니는 기독교 사상가들 중에서 피르미아누스 락탄티우스(Lactantius Firmianus)를 가장 명석한 사상가요 표현력이 가장 탁월한 달변가로 간주한다. 특별히 브루니가 일독을 강추하는 책들은 락탄티우스의 Against False Religion, On the Wrath of God, The Creation of Man이다.

첫번째 책은 이방 종교의 오류와 이방 철학의 헛됨을 지적하며 기독교 신앙의 참됨을 변증한다. 의의 본질은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된 종교는 어떤 것인지, 악인과 의인의 결국은 어떻게 되는지를 탁월한 능변으로 진술한 책이다. 두번째 책은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진노하게 하는 감정을 산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에피큐리아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책이다. 세번째 책은 신비롭고 묘한 인간의 창조를 논함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입증하는 성격을 가진 책이라 하겠다. 이번 주간에는 락탄티우스와 깊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다. 우리는 이렇게 21세기에 살면서도 3-4세기 교부들의 목소리가 전하는 지혜에 아무런 어색함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신비롭다.

CCEL에 보면 영어 번역본이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그런데 제목은 The Christian Institutions, The Anger of God, The Formation of Man이다.

왜 브루니는 자기가 번역한 바질도 아니고 어거스틴도 아니고 락탄티우스를 최고로 여겼던 것일까? 아마도 인문학적 고려가 그의 기호를 좌우한 것이 아닐까? 교부를 교부로 선별하는 일부터 진리와 관련하여 중요성의 서열을 매기는 일까지 각자의 고유한 관점이 개입되지 않는 순간이 없는 것 같다. 관점관리, 철저하게 해야 되겠다.

신학의 쟝르는?

신학은 어떤 종류의 학문인가? 16세기 종교 개혁자들 문헌에는 정교한 논의가 발견되지 않는 이슈 되겠다. 이 주제를 논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17세기 후반의 프란시스 튜레틴 (Franciscus Turretinus)은 그의 변증적 교의학 (Institutio theologicae elencticae (1679-85) 1권에서 신학의 장르를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신학은 조직적 객관적 관점에서 교리(doctrina)라 할 수 있겠으나 성향적 주관적 관점에서 본다면 마음의 성향(mentis habitus)과 관련된다. 튜레틴은 마음의 세가지 성향(habitus sciendi, habitus credendi, habitus opiniandi)을 말하면서 그 각각은 마음의 동의가 확실한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 성향은 scientia, 동의의 기반이 증언이면 그 성향은 fides, 그리고 만약 동의가 이성적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성향은 opinio라 하였다.

Habitus sciendi 와 관련하여 튜레틴은 아리스토텔레스 구분을 언급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 제6권에서 다섯 가지 지성적 성향(habitus intellectuales: intelligentia, scientia, sapientia, prudentia, ars)을 언급하고 있는데 튜레틴은 신학이 이러한 성향들 중의 하나로 제한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1) 신학은 habitus credendi이지 habitus sciendi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2) 모든 지성적 성향들은 자연적인 것인 반면에 신학은 초자연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며, 3) 지성적 훈련들은 단순히 실천적인 것 내지는 이론적인 것이지만 신학은 그 두 가지가 종합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원리에 대한 지식 (intelligentia)가 아니며, 증언에 의존하기 때문에 합리적 논증의 결론들에 대한 지식 (scientia)도 아니다. 신학은 단순히 인지(cognito)에 머물지 않고 실행(operatio)으로 나아가는 지식이라 하겠다. 그리고 신학은 원리와 연관된 결론들 (sapientia)도 아니다. 이는 영적인 것이며 우연적인 상황을 따라 행하여진 일들(agenda) 그 이상을 다루기 때문에 선행을 목적으로 삼는 prudentia도 아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신학은 만들어진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기술(ars)도 아니다. 신학은 이러한 성향들 전체(omnes habitus)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튜레틴의 입장이다. 사실 인간의 다양한 지성적 성향들을 다 동원해도 신학은 다 커버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 중의 몇 가지로 신학을 제한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신학을, 아니 하나님을 물로 보는 오만이다.

우리가 행하는 신학은 대단히 지엽적인 것이다. 신학의 범주에 대한 폴라누스(Polanus) 개념의 정교함을 접한 사람이라 한다면 겸손 없이는 신학이 왜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우리의 신학(theologia nostra)은 비록 우리의 모든 성정을 다 쏟아 붓는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그것도 불완전한 수준으로 행해지는 작업이다. 신학의 장르는 신학계에 발을 담그기 전에 반드시 사려해야 할 관문이라 생각한다. 이는 우리를 신학의 출발점인 경외와 겸손으로 이끌어줄 것이니까.

(사족) 특별히 16세기 후반에는 신학의 주체에 따라 원형신학(theologia archetypa) 모형신학(theologia ectypa) 구분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신학(theologia in se)과 우리에겐 하나님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되 사역적인 관점에서 (sensu operibilis) 알려질 수 있다는 신학(theologia nostra)’의 중세적 스코투스 구분에 의존하고 있다. 신학의 장르를 논함에 있어서 튜레틴도 그런 경향이 다분히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신학 전반을 스코투스 신학의 영향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로서 튜레틴 본인도 거북해 할 것이다.

정통 개혁주의 학자들의 신학은 교부와 중세 학자들과 종교 개혁자들 전체가 개개인을 따라 조금씩 다르게 조합되고 발전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할 때, 하나의 고백적 정체성 안에 서로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신학적 다양성이 공존하고 있다(theological diversity in confessional identity)는 Richard Muller 교수의 관점이 가장 무난해 보인다. 물론 그런 고백적 바운더리 안에서 가장 좋고 엄밀한 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상은 멀러의 제자로서 팔이 안으로 굽은 판단일 수도 있겠다. ㅡ.ㅡ

창세기 1장 1-3절의 삼위일체

창세기 1장 1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은 복수이고 '창조하다' 동사는 단수이다. 그리고 3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하나님'은 복수이고 '가라사대' 동사는 단수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런 불협화음(?) 문법을 그대로 두었고 70인역 헬라어 성경은 모두 단수로 처리해서 번역했다. 그런데 2절에는 '여호와의 신'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여호와'는 복수이고 '신'은 단수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런데 이 창세기 첫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약 '하나님(엘로힘)'이 복수이기 때문에 세 위격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엘로힘)의 신'은 네번째 위격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엘로힘' 안에 언급된 세번째 위격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인 언급을 한 것인가? 아니면 '엘로힘'은 성부와 성자만을 말하는 것이고 그 엘로힘의 '신'은 세번째 위격인 성령을 일컫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이처럼 창세기 첫부분에 등장하는, 인간의 상식과 합리성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단복수의 신비로운 조합에 대하여 칼빈은 사벨리안 오류(성부 성자 성령은 한 위격(one hypostasis)이다)를 지적하며, 그 단어(엘로힘)의 복수성은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revocat) 기능도 있지만 하나님의 많은 권능(multas Dei virtutes)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엘로힘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실체에 내재된 능력(potentiam quae in aeterna eius essentia inclusa fuerat)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다.

성경 전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모두 창조자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여 애매하게 보이는 구절을 해석해야 함이 마땅하다. 1) 그렇다면 창세기 초두에서 언급된 '엘로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엘로힘의 신'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엘로힘은 '성부'와 '성자'로 보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엘로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본다면 '엘로힘의 신'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엘로힘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배타적인 성격으로 이해하면 안될 것이다. 2) 한편으론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엘로힘의 신'에서 '엘로힘'과 '신'을 동격으로 이해할 때 '엘로힘'을 세 위격으로 규정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엘로힘(성부 성자 성령)은 영이시다. 이것을 '엘로힘의 신'이라고 표현한 것이라 주장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어떠한 해석을 취하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흔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혹여나 여기서 이러한 생각을 교리가 성경의 권위를 장악한 결과라고 비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를 종합하여 표현한 것을 '교리'라고 의식하며 그렇게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 전체라는 큰 문맥에서 애매한 구절들을 조명하는 식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교조적인 접근'인 것처럼 매도하지 말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