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6일 목요일

신학의 쟝르는?

신학은 어떤 종류의 학문인가? 16세기 종교 개혁자들 문헌에는 정교한 논의가 발견되지 않는 이슈 되겠다. 이 주제를 논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17세기 후반의 프란시스 튜레틴 (Franciscus Turretinus)은 그의 변증적 교의학 (Institutio theologicae elencticae (1679-85) 1권에서 신학의 장르를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신학은 조직적 객관적 관점에서 교리(doctrina)라 할 수 있겠으나 성향적 주관적 관점에서 본다면 마음의 성향(mentis habitus)과 관련된다. 튜레틴은 마음의 세가지 성향(habitus sciendi, habitus credendi, habitus opiniandi)을 말하면서 그 각각은 마음의 동의가 확실한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 성향은 scientia, 동의의 기반이 증언이면 그 성향은 fides, 그리고 만약 동의가 이성적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성향은 opinio라 하였다.

Habitus sciendi 와 관련하여 튜레틴은 아리스토텔레스 구분을 언급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 제6권에서 다섯 가지 지성적 성향(habitus intellectuales: intelligentia, scientia, sapientia, prudentia, ars)을 언급하고 있는데 튜레틴은 신학이 이러한 성향들 중의 하나로 제한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1) 신학은 habitus credendi이지 habitus sciendi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2) 모든 지성적 성향들은 자연적인 것인 반면에 신학은 초자연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며, 3) 지성적 훈련들은 단순히 실천적인 것 내지는 이론적인 것이지만 신학은 그 두 가지가 종합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원리에 대한 지식 (intelligentia)가 아니며, 증언에 의존하기 때문에 합리적 논증의 결론들에 대한 지식 (scientia)도 아니다. 신학은 단순히 인지(cognito)에 머물지 않고 실행(operatio)으로 나아가는 지식이라 하겠다. 그리고 신학은 원리와 연관된 결론들 (sapientia)도 아니다. 이는 영적인 것이며 우연적인 상황을 따라 행하여진 일들(agenda) 그 이상을 다루기 때문에 선행을 목적으로 삼는 prudentia도 아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신학은 만들어진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기술(ars)도 아니다. 신학은 이러한 성향들 전체(omnes habitus)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튜레틴의 입장이다. 사실 인간의 다양한 지성적 성향들을 다 동원해도 신학은 다 커버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 중의 몇 가지로 신학을 제한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신학을, 아니 하나님을 물로 보는 오만이다.

우리가 행하는 신학은 대단히 지엽적인 것이다. 신학의 범주에 대한 폴라누스(Polanus) 개념의 정교함을 접한 사람이라 한다면 겸손 없이는 신학이 왜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우리의 신학(theologia nostra)은 비록 우리의 모든 성정을 다 쏟아 붓는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그것도 불완전한 수준으로 행해지는 작업이다. 신학의 장르는 신학계에 발을 담그기 전에 반드시 사려해야 할 관문이라 생각한다. 이는 우리를 신학의 출발점인 경외와 겸손으로 이끌어줄 것이니까.

(사족) 특별히 16세기 후반에는 신학의 주체에 따라 원형신학(theologia archetypa) 모형신학(theologia ectypa) 구분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신학(theologia in se)과 우리에겐 하나님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되 사역적인 관점에서 (sensu operibilis) 알려질 수 있다는 신학(theologia nostra)’의 중세적 스코투스 구분에 의존하고 있다. 신학의 장르를 논함에 있어서 튜레틴도 그런 경향이 다분히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신학 전반을 스코투스 신학의 영향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로서 튜레틴 본인도 거북해 할 것이다.

정통 개혁주의 학자들의 신학은 교부와 중세 학자들과 종교 개혁자들 전체가 개개인을 따라 조금씩 다르게 조합되고 발전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할 때, 하나의 고백적 정체성 안에 서로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신학적 다양성이 공존하고 있다(theological diversity in confessional identity)는 Richard Muller 교수의 관점이 가장 무난해 보인다. 물론 그런 고백적 바운더리 안에서 가장 좋고 엄밀한 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상은 멀러의 제자로서 팔이 안으로 굽은 판단일 수도 있겠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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