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8일 목요일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속고 속이는 일의 함정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시시비비 틀어지고 진위가 엇갈리면 왠만한 사람들은 이성의 꼭지가 돌아간다. 그동안 몰랐던, 아니 알았지만 의식의 적당한 조각을 할애하지 않았던 사안의 흐릿한 실루엣이 뚜렷한 현실로 관찰되면 곧장 선전포고 들어가고 그 사안에 의식의 전영역을 투입하는 일들이 주변에서 낯설지 않게 목격된다. 그러나 전쟁이 그렇듯이 주적이 확인되고 그와의 전면전에 돌입하면 가치의 광범위한 재편성이 일어나고 때때로 윤리나 합리성의 떳떳한 실종도 수반한다.
세상에는 속이는 일과 속는 일들이 음모의 은밀한 형태롤 취하기도 하고 분명한 실체가 있어도 '풍문'이란 개념의 탈을 쓰고 위장하는 경우도 있다. 법과 제도라는 공인된 '폭력'이 거짓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고 도덕의 끈이 조금 느슨한 분위기가 마련되면 아예 거짓이 자유의 한 유형으로 공공의 단상에 올라선다. 거짓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인생의 회의는 깊어진다. 뭔가 기초적인 가치의 토대가 무너지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거짓은 함정의 성격을 갖는다.
거짓의 문제는 공공연한 노출로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백주에 까발리면 모든 게 종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거짓의 은폐와 거짓의 득세는 수단적인 들러리 목표일 뿐이다. 그의 감추어진 꼼수는 거짓이 탄로나고 그 기세가 꺾이는 위장된 패배를 미끼로 사람들의 호기심과 분노가 거짓의 페러다임 속에서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수천년 전에 욥이 간파했던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다 주님께 속했다'는 광의의 섭리 개념을 탈취하는 꼼수 말이다. 거짓의 출입이 없는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 자체를 봉쇄하는 꼼수 말이다.
거짓을 관찰하고 거짓을 파헤치고 거짓에 분노하고 거짓의 정복에 환희하는 거짓 중심적인 사고방식 및 행동양식, 괜찮다고 안심하는 와중에 이루어진 거짓과의 동거가 사단이 파놓은 함정이란 얘기다. 바울은 속고 속이는 일들이 신앙과 삶을 주조하는 거푸집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다. 우리의 의식과 삶을 움직이는 중심추와 틀은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안에서 존재하고 살며 기동해야 한다.
그를 본 모든 자들이 보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유와 언어와 삶과 행실의 중심이지 않으면 사단의 어두움을 이기고 정복하고 희열하는 중에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는 그의 함정 안에서 놀아나는 패배자가 된다. 기준을 사단의 손에 양도하지 말아야 하겠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게 사단의 위장된 프레임에 놀아나지 않는 비결이다.
시시비비 틀어지고 진위가 엇갈리면 왠만한 사람들은 이성의 꼭지가 돌아간다. 그동안 몰랐던, 아니 알았지만 의식의 적당한 조각을 할애하지 않았던 사안의 흐릿한 실루엣이 뚜렷한 현실로 관찰되면 곧장 선전포고 들어가고 그 사안에 의식의 전영역을 투입하는 일들이 주변에서 낯설지 않게 목격된다. 그러나 전쟁이 그렇듯이 주적이 확인되고 그와의 전면전에 돌입하면 가치의 광범위한 재편성이 일어나고 때때로 윤리나 합리성의 떳떳한 실종도 수반한다.
세상에는 속이는 일과 속는 일들이 음모의 은밀한 형태롤 취하기도 하고 분명한 실체가 있어도 '풍문'이란 개념의 탈을 쓰고 위장하는 경우도 있다. 법과 제도라는 공인된 '폭력'이 거짓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고 도덕의 끈이 조금 느슨한 분위기가 마련되면 아예 거짓이 자유의 한 유형으로 공공의 단상에 올라선다. 거짓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인생의 회의는 깊어진다. 뭔가 기초적인 가치의 토대가 무너지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거짓은 함정의 성격을 갖는다.
거짓의 문제는 공공연한 노출로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백주에 까발리면 모든 게 종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거짓의 은폐와 거짓의 득세는 수단적인 들러리 목표일 뿐이다. 그의 감추어진 꼼수는 거짓이 탄로나고 그 기세가 꺾이는 위장된 패배를 미끼로 사람들의 호기심과 분노가 거짓의 페러다임 속에서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수천년 전에 욥이 간파했던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다 주님께 속했다'는 광의의 섭리 개념을 탈취하는 꼼수 말이다. 거짓의 출입이 없는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 자체를 봉쇄하는 꼼수 말이다.
거짓을 관찰하고 거짓을 파헤치고 거짓에 분노하고 거짓의 정복에 환희하는 거짓 중심적인 사고방식 및 행동양식, 괜찮다고 안심하는 와중에 이루어진 거짓과의 동거가 사단이 파놓은 함정이란 얘기다. 바울은 속고 속이는 일들이 신앙과 삶을 주조하는 거푸집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다. 우리의 의식과 삶을 움직이는 중심추와 틀은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안에서 존재하고 살며 기동해야 한다.
그를 본 모든 자들이 보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유와 언어와 삶과 행실의 중심이지 않으면 사단의 어두움을 이기고 정복하고 희열하는 중에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는 그의 함정 안에서 놀아나는 패배자가 된다. 기준을 사단의 손에 양도하지 말아야 하겠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게 사단의 위장된 프레임에 놀아나지 않는 비결이다.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하나님이 내 영광이다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원소 검진으로 지구가 태양에서 생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의 확증이 지구의 선행적인 창조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과 관계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의 구성이 4일째의 일이라는 사실을 반박할 수는 없게 되었다. 지구의 92개나 되는 원소들 중 저울의 지시침을 가장 크게 움직이는 우라늄이 지구 밖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구를 우주의 무수한 별들에서 떨어진 한 조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최소한의 근거는 되었다.
태양과 달을 궁창의 적당한 위치에 걸고 주야를 주관하게 하신 것은 빛의 생산자가 아니라 관리자의 기능을 부여했을 뿐이며 우리에게 빛의 근원을 이 땅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다른 곳에서 찾으라는 비유의 성격이 강한데, 이는 광합성을 생존의 원리로 가진 식물이 태양이 조성되기 이전에 이미 지구에 출현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생태계의 근간이라 할 식물의 존립이 태양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란 사실의 희미한 그러나 결정적인 암시라고 보아도 좋겠다.
여호와가 내게 영영한 빛이 되신다는 건 이성의 합리적인 납득과 단절적인 진리이긴 하지만 그 진리를 알만한 흔적들을 만드신 모든 것들에 분명히 남겨 두셨다는 로마서 1장의 지적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생존이 적당한 온도와 알맞은 기압과 한 줌의 산소를 비롯한 환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건 인간의 자율적 독립성 논의의 목덜미를 거머쥐는 반증의 불쾌한 암내를 풍기던 사안이다. 동시에 인간의 굶주린 종교성이 대상을 찾아 피조된 자연으로 마구 발산되는 출구 역할도 만만치 않게 했드랬다.
나는 그 모든 인간의 의존성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고 기동하며 산다는 사실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설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영한 빛이라면 태양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으며 자연의 빛에 의존하는 모든 피조물이 어찌할 수 없으며 자연의 빛을 임의로 출입하는 천사들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들로 여기고 자연을 마구 유린하는 삐딱한 적용점에 백조의 날개를 달았다는 안드로메다행 착각에 도취된 분들의 간헐적인 등장이 이 사실을 없이하진 못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영광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소멸되지 않는 영영한 빛이시다. 태양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에도, 하늘과 땅의 체질이 녹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가감되지 않는 진리이다. 이런 진리를 주목하고 있노라면, 일상의 문턱을 수시로 드나드는 다양한 희로애락 흉물들과 다소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관조할 수 있는 내공이 서서히 형성된다. 무시가 아니라 적극 개입하되 중심추는 하나님이 내 영광이란 사실에 두는 내공 말이다...오늘은 그런 내공의 등짝을 한번 더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원소 검진으로 지구가 태양에서 생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의 확증이 지구의 선행적인 창조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과 관계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의 구성이 4일째의 일이라는 사실을 반박할 수는 없게 되었다. 지구의 92개나 되는 원소들 중 저울의 지시침을 가장 크게 움직이는 우라늄이 지구 밖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구를 우주의 무수한 별들에서 떨어진 한 조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최소한의 근거는 되었다.
태양과 달을 궁창의 적당한 위치에 걸고 주야를 주관하게 하신 것은 빛의 생산자가 아니라 관리자의 기능을 부여했을 뿐이며 우리에게 빛의 근원을 이 땅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다른 곳에서 찾으라는 비유의 성격이 강한데, 이는 광합성을 생존의 원리로 가진 식물이 태양이 조성되기 이전에 이미 지구에 출현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생태계의 근간이라 할 식물의 존립이 태양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란 사실의 희미한 그러나 결정적인 암시라고 보아도 좋겠다.
여호와가 내게 영영한 빛이 되신다는 건 이성의 합리적인 납득과 단절적인 진리이긴 하지만 그 진리를 알만한 흔적들을 만드신 모든 것들에 분명히 남겨 두셨다는 로마서 1장의 지적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생존이 적당한 온도와 알맞은 기압과 한 줌의 산소를 비롯한 환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건 인간의 자율적 독립성 논의의 목덜미를 거머쥐는 반증의 불쾌한 암내를 풍기던 사안이다. 동시에 인간의 굶주린 종교성이 대상을 찾아 피조된 자연으로 마구 발산되는 출구 역할도 만만치 않게 했드랬다.
나는 그 모든 인간의 의존성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고 기동하며 산다는 사실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설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영한 빛이라면 태양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으며 자연의 빛에 의존하는 모든 피조물이 어찌할 수 없으며 자연의 빛을 임의로 출입하는 천사들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들로 여기고 자연을 마구 유린하는 삐딱한 적용점에 백조의 날개를 달았다는 안드로메다행 착각에 도취된 분들의 간헐적인 등장이 이 사실을 없이하진 못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영광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소멸되지 않는 영영한 빛이시다. 태양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에도, 하늘과 땅의 체질이 녹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가감되지 않는 진리이다. 이런 진리를 주목하고 있노라면, 일상의 문턱을 수시로 드나드는 다양한 희로애락 흉물들과 다소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관조할 수 있는 내공이 서서히 형성된다. 무시가 아니라 적극 개입하되 중심추는 하나님이 내 영광이란 사실에 두는 내공 말이다...오늘은 그런 내공의 등짝을 한번 더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예수님의 세금관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성나게 하지 않기 위하여...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예수님과 사도들의 세금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구절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금을 냈다. 그것도 이스라엘 정부가 아니라 지배국의 세관에게 내는 것이어서 유대인의 불편한 심기도 건드리고 민족의 복음화도 무기한 지체될 소지가 다분한 판단을 내리셨다. 어쩌자고~~~! 오히려 납세를 거부하면 유대인의 환심을 비롯하여 애족심, 민족의 영도자, 저항의 등불 등등의 건질만한 명분이 짭짤했을 텐데도 주님은 납부를 택하셨다. 납세의 유무라는 행위의 껍질이 아니라 그런 판단의 동기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와 소유자가 되신 주님께 세금을 내라고 납세 고지서를 내밀 개념 없는 피조물은 없다. 하지만 주님은 나라가 나라를 빼앗고 힘의 지배가 국가간의 질서였던 질풍노도 시대의 한복판에 서 계셨을 때에라도 성실한 세금 납부자의 본을 보이셨고 성직자의 대표격에 해당하는 사도들도 그리하라 하셨다. 이유는 덕을 세우기 위해서다. 관원들을 성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셨던 거다. '고작 그것' 때문에 이 중차대한 세금 문제에 그토록 가벼운 처신을 하신 거냐는 까칠한 반문,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도 발끈했던 대목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덕 세우는 문제는 '고작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재해석에 들어갔다. 타인의 양심과 타인의 유익을 먼저 추구하는 건 기독교 사회윤리 강령의 일번지다. 이런 근거를 따라 바울은 자신에게 합법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덕을 세우지 않는다면 적법한 자유와 권리조차 포기할 정도였다. 덕의 중요성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즉, 덕은 자유나 합법보다 우선한다. 심지어 불이익과 억울함에 대해서도 덕이 앞선다는 가치의 순위는 동일하다.
시시비비 따지고 옳고그름 가리는 거 다 좋다. 그러나 자신의 손익에 수종드는 것이라면 좋지가 않다. 사실과 옮음도 타인의 양심과 유익을 추구하는 맥락에서 비로소 정당한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손해만 보라는 지갑 떨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의 유익을 구한다는 건 화폐로 산정되는 단편적인 유익을 (필요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 복음의 진리가 전해지는 궁극적인 유익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공세를 납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세기에 비해 지금은 공세의 개념이나 종류나 방식이나 범위나 대상이나 액수 등등에서 현저히 달라졌기 때문에 획일적인 대응이 곤란하다. 당연히 결론 없는 갑론을박 논쟁이 난무한다. 그러다가 많은 분들이 적법성 따지는 선에서 대체로 넘어진다. 합법도 덕 앞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돌린 바울이 이런 장면을 본다면 미간이 구겨질 일이겠다. 세급납부 유무가 아니라 기준의 변질 때문이다. 비록 반론의 이빨에 자갈을 물리는 사실과 적법과 옳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사단이 노리는 패배의 핵심은 기준의 하향 평준화다. 그 지점에서 넘어진 거다.
소득원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에서 삶도 수반되지 않은 경박한 언사 내뱉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거 사실이다. 그래도 앞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의 다짐으로 보시면 되겠다.
시시비비 따지고 옳고그름 가리는 거 다 좋다. 그러나 자신의 손익에 수종드는 것이라면 좋지가 않다. 사실과 옮음도 타인의 양심과 유익을 추구하는 맥락에서 비로소 정당한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손해만 보라는 지갑 떨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의 유익을 구한다는 건 화폐로 산정되는 단편적인 유익을 (필요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 복음의 진리가 전해지는 궁극적인 유익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공세를 납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세기에 비해 지금은 공세의 개념이나 종류나 방식이나 범위나 대상이나 액수 등등에서 현저히 달라졌기 때문에 획일적인 대응이 곤란하다. 당연히 결론 없는 갑론을박 논쟁이 난무한다. 그러다가 많은 분들이 적법성 따지는 선에서 대체로 넘어진다. 합법도 덕 앞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돌린 바울이 이런 장면을 본다면 미간이 구겨질 일이겠다. 세급납부 유무가 아니라 기준의 변질 때문이다. 비록 반론의 이빨에 자갈을 물리는 사실과 적법과 옳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사단이 노리는 패배의 핵심은 기준의 하향 평준화다. 그 지점에서 넘어진 거다.
소득원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에서 삶도 수반되지 않은 경박한 언사 내뱉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거 사실이다. 그래도 앞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의 다짐으로 보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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