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7일 수요일

속고 속이는 일의 함정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시시비비 틀어지고 진위가 엇갈리면 왠만한 사람들은 이성의 꼭지가 돌아간다. 그동안 몰랐던, 아니 알았지만 의식의 적당한 조각을 할애하지 않았던 사안의 흐릿한 실루엣이 뚜렷한 현실로 관찰되면 곧장 선전포고 들어가고 그 사안에 의식의 전영역을 투입하는 일들이 주변에서 낯설지 않게 목격된다. 그러나 전쟁이 그렇듯이 주적이 확인되고 그와의 전면전에 돌입하면 가치의 광범위한 재편성이 일어나고 때때로 윤리나 합리성의 떳떳한 실종도 수반한다.

세상에는 속이는 일과 속는 일들이 음모의 은밀한 형태롤 취하기도 하고 분명한 실체가 있어도 '풍문'이란 개념의 탈을 쓰고 위장하는 경우도 있다. 법과 제도라는 공인된 '폭력'이 거짓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고 도덕의 끈이 조금 느슨한 분위기가 마련되면 아예 거짓이 자유의 한 유형으로 공공의 단상에 올라선다. 거짓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인생의 회의는 깊어진다. 뭔가 기초적인 가치의 토대가 무너지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거짓은 함정의 성격을 갖는다.

거짓의 문제는 공공연한 노출로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백주에 까발리면 모든 게 종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거짓의 은폐와 거짓의 득세는 수단적인 들러리 목표일 뿐이다. 그의 감추어진 꼼수는 거짓이 탄로나고 그 기세가 꺾이는 위장된 패배를 미끼로 사람들의 호기심과 분노가 거짓의 페러다임 속에서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수천년 전에 욥이 간파했던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다 주님께 속했다'는 광의의 섭리 개념을 탈취하는 꼼수 말이다. 거짓의 출입이 없는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 자체를 봉쇄하는 꼼수 말이다.

거짓을 관찰하고 거짓을 파헤치고 거짓에 분노하고 거짓의 정복에 환희하는 거짓 중심적인 사고방식 및 행동양식, 괜찮다고 안심하는 와중에 이루어진 거짓과의 동거가 사단이 파놓은 함정이란 얘기다. 바울은 속고 속이는 일들이 신앙과 삶을 주조하는 거푸집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다. 우리의 의식과 삶을 움직이는 중심추와 틀은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안에서 존재하고 살며 기동해야 한다.

그를 본 모든 자들이 보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유와 언어와 삶과 행실의 중심이지 않으면 사단의 어두움을 이기고 정복하고 희열하는 중에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는 그의 함정 안에서 놀아나는 패배자가 된다. 기준을 사단의 손에 양도하지 말아야 하겠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게 사단의 위장된 프레임에 놀아나지 않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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