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예수님의 세금관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성나게 하지 않기 위하여...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예수님과 사도들의 세금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구절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금을 냈다. 그것도 이스라엘 정부가 아니라 지배국의 세관에게 내는 것이어서 유대인의 불편한 심기도 건드리고 민족의 복음화도 무기한 지체될 소지가 다분한 판단을 내리셨다. 어쩌자고~~~! 오히려 납세를 거부하면 유대인의 환심을 비롯하여 애족심, 민족의 영도자, 저항의 등불 등등의 건질만한 명분이 짭짤했을 텐데도 주님은 납부를 택하셨다. 납세의 유무라는 행위의 껍질이 아니라 그런 판단의 동기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와 소유자가 되신 주님께 세금을 내라고 납세 고지서를 내밀 개념 없는 피조물은 없다. 하지만 주님은 나라가 나라를 빼앗고 힘의 지배가 국가간의 질서였던 질풍노도 시대의 한복판에 서 계셨을 때에라도 성실한 세금 납부자의 본을 보이셨고 성직자의 대표격에 해당하는 사도들도 그리하라 하셨다. 이유는 덕을 세우기 위해서다. 관원들을 성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셨던 거다. '고작 그것' 때문에 이 중차대한 세금 문제에 그토록 가벼운 처신을 하신 거냐는 까칠한 반문,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도 발끈했던 대목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덕 세우는 문제는 '고작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재해석에 들어갔다. 타인의 양심과 타인의 유익을 먼저 추구하는 건 기독교 사회윤리 강령의 일번지다. 이런 근거를 따라 바울은 자신에게 합법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덕을 세우지 않는다면 적법한 자유와 권리조차 포기할 정도였다. 덕의 중요성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즉, 덕은 자유나 합법보다 우선한다. 심지어 불이익과 억울함에 대해서도 덕이 앞선다는 가치의 순위는 동일하다.

시시비비 따지고 옳고그름 가리는 거 다 좋다. 그러나 자신의 손익에 수종드는 것이라면 좋지가 않다. 사실과 옮음도 타인의 양심과 유익을 추구하는 맥락에서 비로소 정당한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손해만 보라는 지갑 떨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의 유익을 구한다는 건 화폐로 산정되는 단편적인 유익을 (필요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 복음의 진리가 전해지는 궁극적인 유익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공세를 납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세기에 비해 지금은 공세의 개념이나 종류나 방식이나 범위나 대상이나 액수 등등에서 현저히 달라졌기 때문에 획일적인 대응이 곤란하다. 당연히 결론 없는 갑론을박 논쟁이 난무한다. 그러다가 많은 분들이 적법성 따지는 선에서 대체로 넘어진다. 합법도 덕 앞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돌린 바울이 이런 장면을 본다면 미간이 구겨질 일이겠다. 세급납부 유무가 아니라 기준의 변질 때문이다. 비록 반론의 이빨에 자갈을 물리는 사실과 적법과 옳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사단이 노리는 패배의 핵심은 기준의 하향 평준화다. 그 지점에서 넘어진 거다.

소득원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에서 삶도 수반되지 않은 경박한 언사 내뱉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거 사실이다. 그래도 앞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의 다짐으로 보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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