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8일 일요일

하나님을 향유하다

하나님 자신만을 유일한 향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어거스틴 사상의 굵고 넓은 스케일이 가늠되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다 하나님 향유의 수단이요 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좌절과 절망도 상대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고 수단이란 얘기지요.
땅에서의 기쁨과 흥분과 감격과 아름다움 역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거기가 종착지인 것처럼 소망과 절망을 걸지 않는 게 지혜인 듯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도 거기가 전부인 것처럼 분노하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가까운 사람과의 이격과 갈등도 아프지만 여전히 상대적인 것입니다.
변할 줄 모르는 고질적인 난황도 시간의 올가미에 걸려 있습니다.

지혜자의 정확한 지적처럼 생명의 근원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반응의 포커스를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비록 원수라도 화목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끝까지 믿고 맡기면 말씀의 운동력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신뢰하면 천지가 흔들려도 여유와 쉼이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마음이 말씀에 정박해 있으면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법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미소를 짓습니다. 눈물이 흐르지요.
그런데 '그리하지 않더라도' 신앙은 그 미소가 구말리로 번지게 만듭니다.
이는 자연의 관찰에서 걸러지지 않고 유독 믿음의 눈으로만 보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분만을 향유할 수밖에 없어짐을 느낍니다.
이를 악물고 결단하는 향유가 아니라 그리 아니할 수 없는 향유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왜 이리도 좋을까요? 닭살이 몇 개 올라올 정도로요 ^^

아무일도 없었고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민데 말이지요...

2013년 12월 7일 토요일

고백의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저술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속에 흩어진 나를 모으는 것이 회상이고,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통합이다. 이것이 고백의 목적이다. 여기서 히포의 주교는 과거로 흘러간 자신의 흔적까지 자아의 개념에 집어넣고 있다.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통합의 방편이 고백이란 점, 흥미롭다. 관념의 하루를 닫는 일기도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통합의 당일치기 방편일 수 있겠구나. 하루하루 매 순간마다 떠오르는 생각의 자취들을 모아 메모하는 것도 하나님께 나를 모아 드리는 통합의 소중한 도구겠다.

고백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이라, 어거스틴 고백록을 묵상하다 건진 짭짤한 교훈이다. 고백의 주어가 나이기에 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삶과 사태를 알고 경험하고 수집하여 고백의 내용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건 조금 어색하다.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희생하고 섬기고 돌보며, 내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형제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품고 기도하는 그런 '나'의 삶이라는 고백의 소여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아야 하겠기에 드는 생각이다.

신에게 고백의 글을 출간하는 것이 낯설었던 시대에 당시 출판계의 문화를 쇄신했던 이런 고백서 형식의 문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각자의 삶 전체가 언어로 번역된 기도문을 하나님께 올리는 건 아름답고 향기로운 시도이다. 남에게 읽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민망하고 소름도 한 움큼은 떠밀어낼 일이지만 시편의 기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찬양의 한 쟝르로 생각하면 닭살까지 돌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순수한 동기를 유지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다. 

행복에의 회복

히포의 주교에게 1) 하나님 추구와 2) 행복 추구와 3) 진리 추구는 동일하다.

귀하고도 부러웠다. 하나님 추구와 진리 추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생의 판단력과 체질을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저력이다. 하나님과 진리와 행복의 동일시가 이론적인 지식으로 고수하는 사람들을 보았어도 그것이 전인격과 생을 관통하는 경우는 희귀한데 희포의 주교는 이런 점에서도 본받고 싶은 귀감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 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거스틴 진단은 이렇다. 행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면 추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와 부패에 참여한 것처럼 타락 이전의 아담이 누렸던 행복에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으로 행복에 참여하는 것인지, 실재로 참여하는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아담이 잃어버린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었다. 참된 삶이란 진리를 갈구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이니 결국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삶이고 행복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것은 진리와 하나님과 행복과 진정한 삶을 동시에 등돌린 격이었다. 모든 것이 절망으로 돌변했다.

유일한 회복은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인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오셨다. 회복의 성취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몫이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블레싱의 삶이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행복론은 불행론의 다른 이름이다. 행복의 개념적 도전은 이제 종결이다. 그러나 행복의 체질전환 문제는 별개이다. 

연구의 대상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우리나라 상황이 아니고 우리나라 문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언어가 아니고 우리나라 사태가 아니면 무엇이든 연구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사람과 상황과 문화와 언어와 사태는 우리에게 쉽게 알려진다. 정보 접근력의 용이성이 가치의 낮음과 결부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쉽게 간과된다. 홀대를 당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타인들에 대해서는 깍듯하고 관대한데 가깝고 편한 가족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무례하게 대하는 것과 흡사한 인상 말이다. 유럽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연구할 때 그들의 삶이 먼 시대여서 그들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연구의 대상으로 여겼었다. 어떤 의식에 사로잡힌 태도였다. 물론 환경에는 하나님의 지문이 잔뜩 묻어 있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주변에서 설정된 가치의 우선순위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보다 중차대한 것을 홀대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게 된다. 집중적인 학구열 투입의 대상은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신학 전공자의 도리는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인 조명임에 분명하나 여전히 가치의 개입이 필요하다.

불안증

불안증은 하나님이 우리을 일깨우는 자극이다. 신호등과 같아서 집중해야 하고 지시를 정확히 이행해야 한다. 무시하면 불안증이 우리를 무시하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하게 주어지는 불안도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그런 신호등이 없다면 인생은 무모한 아우토반 질주에 내던져질 수 있어서다.

균형을 위해서는 견제가 필요하다. 때때로 불안은 하나님의 윗트라는 생각까지 든다. 여기서도 측량하지 못할 하나님의 지혜가 번뜩인다. 도대체 어떻게 불안이란 것이 인간에게 있을까? 불안은 신비로운 현상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의 물꼬일 수도 있겠다. 너무 나아갔나? 불안은 고통과도 유사한 하나님의 '선물'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