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8일 목요일

당연한 것에 딴지를 건다

아들: 아빠, 오늘은 봄 같아요. 낮에는 기온이 떨어질 거래요.

아빠: 어떻게 알았어? 아침에 일기예보 들었구나.

아들: 지금이 42도인데 그 분이 정확히 맞췄네요.

아빠: 은진아, 날씨와 온도를 맞추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게 희미한 예측일 뿐이란다. 사람들은 미래를 정확히는 잘 모르거든. 그런데 은진아, 넌 미래를 다 알고 싶니 아니면 지금 적당히 모르는 게 좋아?

아들: 저는 알고 싶지 않아요. 나쁜 일들도 있을 건데 알아도 바꾸지를 못하는 거잖아요.

아빠: 하나 더 물어볼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잖아. 그런데 왜 사람은 미래를 다 알지 못하는 거지? 정확히 말하면 한 치 앞을 모르거든. 이것이 우리에겐 익숙한 일이지만 현실을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은 이유와 목적이 있으셨을 거 같아. 어떻게 생각해? 전도서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로 미래를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그랬거든. 기억하지?

아들: 으음~~~ 네, 그런데 잘은 기억이 안나요. 우리를 겸손하게 하려고 그러신 거에요?

아빠: 아주 가깝다.

아들: 미래를 다 알면 하나님을 안믿을 수 있으니까?

아빠: 그래 그거란다. 사람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면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미래를 다 아는데 하나님께 아쉬울 게 없잖아. 미래에 불안한 요소도 없으니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흥미도 없겠지만 보다 중요한 건 하나님을 생각도 기대도 안하게 된다는 거지.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본성을 가지고 있잖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힘으로 존재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도록 되어 있는 본성 말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곧장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을 자신의 의식과 삶에서 배설하듯 밖으로 밀어내고 말거든. 그렇게 되면, 사람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고 하나님과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다 버리는 셈이 되는거지. 사실 마귀는 이런 것을 노린단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버리도록 만들지.

아들: 생각하지 못했던 거네요.

아빠: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서 망각되는 대단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이 많단다. 은진이 지금 수학 열심히 공부하지. 그런데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면 어떤 수학을 배우는지 아니? 지금은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해서 맞추면 좋아라 하잖아. 물론 필요해. 기본적인 거지.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면 우리에게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따지기 시작할 거야. 봐라. 은진이는 1+1=2이라고 생각하지?

아들: 네, 당연한 거잖아요.

아빠: 그런데 그런 '당연'에 딴지를 걸게 된다는 거지. 그게 왜 당연한지 묻는단다.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그 물음의 대답이 되지는 않는 공부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지. 은진이도 곧 출입하게 될 게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분이 그렇게 만드시고 이끄시고 계시니까. 바울이 그랬잖아...

아들: 그런 공부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갈께요, 아빠. 바이, 아일러뷰!!!

아빠: 공부는 고달프고 몸을 피곤하게 만든단다....ㅎㅎㅎ 나두 알러뷰~~

2012년 3월 6일 화요일

주님의 짝사랑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토록 내 손을 벌렸노라 (롬10:21)

ㅎㅎㅎ 우리 주님의 마음이 너무도 짠~~하게 느껴지는 말씀이다.
자기 백성들이 알아 주지도 않는 짝사랑의 대부 다우시다.
어쩌자고 이렇게 늘 손해보는 사랑에 지칠 줄 모르실까.
심은대로 거두는 것도 부족하다 하여
심지 않은 것까지도 어떤 식으로든 챙기려는 세상에
주님의 이러한 사랑은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ㅡ.ㅡ

우리는 그런 주님의 사랑을 의식하든 안하든 호흡하며 살아간다.
짝사랑은 건강한 사랑이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해 봤드랬다.
쌍방간의 반응이 필요하다. 우리의 반응은 '그분을 인정하는 거다.'
'고작' 그거 바라시고 우리를 사랑하되 수면도 접으셨다.
아니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분을 인정하는 것은 '고작'의 수준일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대로 사랑하라 했으니까.
외롭고 서운한 짝사랑의 길을 인내로써 걸어야 된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면 그는 그런 길과 무관한 사람이다.
나를 알지도 인정치도 않는 사람까지 사랑해야 하는 길이어서다.
심지어 죽음의 십자가를 그것도 부당하게 어깨에 건 사람까지...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위해
'시기'라는 방식을 택하셨다.
사랑을 아는 자들은 이 '시기'의 가공할 약발을 아시리라 생각된다.
온 세상에 흩어진 백성들에 의해 찾은 바 되시는 방식 말이다.
물론, 이런 방법은 자식이나 아내에게 '고의로' 사용하면 안되는 거다.
아주 위험한 거거든...ㅎㅎㅎ

2012년 3월 5일 월요일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어떤 집사님이 물으셨다.

한전도사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 눅16;25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물질과 구원에 대한 누가복음의 강조를 잘 드러내는데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과 어떻게 조화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집사님, 무식과 무례를 무릎쓰고 몇 자 올립니다~~ ^^;
먼저 누가복음 16장을 꾹 짜보면 나오는 엣기스는 이런 것 같습니다.
율법에 대한 내용이 있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있고,
그것이 삶에 펼쳐진 내용은 물질에 관계된 행위이고,
이렇게 경험과 이론과 태도가 버무려진 장면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로 구체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합적인 내용을 먼저 인간 문맥에서 경험되는
부자의 물질적인 삶으로 시작하는 가장 용이한 방식으로 설명한 이후에
부자의 형제들과 관련하여 구약의 권위가 부활이란 주제와 더불어
부각되고 있음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과 직결된 문제이고
히브리서 4장이 풀어내고 있는 것처럼
구약이나 신약이나 사람들은 동일한 복음을 받았으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음이 합하지 않았다'는 공통의 이유가
지적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율법과 다른 의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생각할 때에
행위와 믿음의 대립항 구조보다 행위는 믿음의 표상이고
믿음은 행위의 씨앗으로 보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을 주목하면
부자의 물질생활 문제에 대한 아브라함 지적은
그가 외모에 근거한 판단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겨냥한 것이었고
모세의 증거에 대한 부자 형제들의 불신은
부활한 자가 그들에게 갈지라도 변경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구원에 대한 신구약의 일치성이 선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의 일부임에 분명하나
그것이 구원을 좌우하는 원인이나 기준이 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부자의 그릇된 물질사용 이면에 모세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는
예수님 이야기의 본질을 고려해 본다면 누가복음 15장의 핵심을
굳이 행위와 믿음 혹은 율법과 은혜라는 대립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을
재고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애송이 신학생에 불과한 제가 감히
주름을 잡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ㅡ.ㅡ
혹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20분짜리 결혼식을 다녀와서...


어떤 집사님의 딸 결혼식이 있었다. 신랑은 중국 청년이다. 예식장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중심으로 채워졌고 드물게 미국인 하객들도 끼어 있었다. 축가도 없었고 피아노도 없었고 주례사도 짧았다. 20분 정도가 소요된 예식이 한 가정을 만들었다. 예식은 그냥 치루고 지나가는 형식에 불과했다. 인상적인 장면도 있었다. 예식이 공포되기 직전에 신랑과 신부가 들러리 두 사람과 함께 하객들 앞에서 서명을 하는 것이었다. 소위 결혼 증명서다. 미국에는 이것이 하나의 신분증 역할을 한다. 법정적인 문서이기 이전에 두 사람이 결혼 계약을 맺었다는 당사자의 의사표시 싸인이 들어가야 한다. 싸인이 들어가지 않은 결혼 증명서는 무효이다. 결혼 당사자의 의견이 존중되고 있다는 것이 싸인 풍습으로 반영된 것 같다. 나는 지금 특정한 개인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에 대한 현대의 보편적인 의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경험하는 하나의 작은 계기요 사례로 언급한 것일 뿐이다. 사실 신부와 신랑,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들로 보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아래 행복한 신혼이 이어지고 원숙한 부부가 될 때가지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며 함께 가정을 세워가는 모습이 예상되는 부부이다. 특정한 개인의 어떠한 지적하는 것은 전혀 나의 의도와 무관하다.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미국식 결혼, 이는 한국과 중국의 전통적인 결혼식과 약간의 대조를 이룬다. 특별히 중국의 혼례는 성인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씨족과 씨족간의 결합이며 결속을 보여주는 문화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다. 혼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말과 중매자의 말이었다. 개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서로 가문의 수준이 비슷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것을 살피고 비교하여 평가하는 중매자의 말은 혼례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매자 없이도 부모들 간에 서로 동의가 되었다면 씨족간의 결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므로 결혼은 자연스런 결과로 이어질 것이기에 부모의 말은 결혼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다.

집단주의 vs 개인주의, 이런 대립이 결혼에도 나타나는 것 같다. 성경은 어떤 종류의 결혼을 권장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결혼의 성경적 원리를 찾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 20분짜리 결혼식을 보면서 개인들의 의사가 존중되어 결혼이 개인적인 결합의 의미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졌다면 그만큼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 너무 쉽게 결정되고 가볍게 여길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생겼다는 것을 잠시 생각하고 싶어서다. 결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개인만의 중대사도 아닌 것 같다. 결혼은 비록 두 당사자의 결합이나 이로써 산출되는 개념은 가정이다. 당사자 개개인의 성격을 단순히 합산한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 두 사람의 연합에서 발생한 것이다. 소위 창발이다. 그러나 '창발' 개념이나,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진화론적 시스템 사고를 두둔하려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결혼은 창발이나 진화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 신적인 기원과 의도를 가진 창조상의 제도이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세포와 같은 공동체다. 또한 그 최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모형이다. 성격이 다르고 삶의 스타일이 다르고 기호가 바뀌었다 해서 임의로 변경을 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다.

나는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내와 자녀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가정에 내포된 본질적인 의미과 가치를 인지하고 소중히 지켜 나가야 되겠다. 그래,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에 감정과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가정을 사랑과 지혜와 진리로 지키는 거다. 그게 지금 내가 오늘 느끼고 붙들어야 할 내용으로 생각하는 것들이다. 오늘은 교회에서 잠자리를 마련했다. 아내와 아이들의 사랑스런 표정이 감은 눈꺼플 속면에 투영된다. 생각의 팔을 뻗어 그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더듬는다. 주님께서 주신 상급이요 기업이다. 기쁨과 감사로 살피고 보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