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언약신학 고전이다

아래에 링크된 파일은 엔드류 울시의 1988년 박사학위 논문이며 이제는 언약신학 고전으로 통하는 문헌이다. 조엘비키 교수님은 RHB에서 12월 중순에 이 논문의 단행본 출간을 계획하고 계시단다. 멀러 교수님은 언약논문 쓰는 사람에게 늘 필독을 권하셨던 책이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개혁교회 전체에 끼친 역병의 심각성을 주장하는 분들의 오해와 오류를 지적하고 교정하기 위해 언약사상 전반의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그 통일성과 연속성을 섭렵한 논문이다. 일독도 권하지만 한국의 언약사상 발전을 위해 번.역.서.도 나와야 할 문헌이라 사료된다.

Andrew Woolsey, Unity and Continuity in Covenantal Thought: A Study in the Reformed Tradition to the Westminster Assembly (Ph.D Dissertation: Glasgow, 1988)

Volume I/ Volume II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입문서


두 번째 번역서의 해산이 코 앞이다. 본서는 벨기에 루뱅에 소재한 복음주의 신학교(The Evangelical Theology)의 역사신학 교수, 멀러 교수님의 유럽절친 Willem van Asselt의 주도로 출간된 16-17세기 개혁신학 입문서다. 추천서를 쓴 멀러 교수님이 밝혔듯이, "본서는 정통주의 시대를 간결하게 개관하고,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다양한 궤적들과 학파의 계보를 따라 소개하고, 스콜라주의와 정통주의 신학의 주요 개념들을 주의 깊게 다루고, 이 분야를 다루는 연구 문헌들의 동향도 정리해 주고 있다."

번역하는 내내 개혁신학 혹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관련된 과목의 교재로 사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난 여름에 만나뵌 문병호 교수님도 같은 생각으로 번역하고 싶으셨던 책이라 하셨~~~으나 한 발 늦으셨다 (^^). 책의 두께나 내용의 깊이나 문체의 유연함, 어디를 보아도 입문서 교재로는 딱이다. 자신의 역서를 스스로 띄우는 건 낯뜨거운 일이지만 책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없어서 그런 것으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라. 이번 주부터 시중에 깔린단다. 표지가 마음에 쏘옥 든다. 속 디자인도 궁금하다. 속히 손아귀에 들어오면 좋겠다.

빌렘 반 아셀트 외, 개혁신학과 스콜라주의 (부흥과개혁사: 한병수 역, 2012)

Eusebius 오페라 (1570)

16세기 후반부에 바젤과 바젤 대학교는 그리네우스의 지도하에 개혁주의 대학과 도시로 변했으며 당시의 바젤 개혁주의 교회와 사도적 고대교회 사이에 교리적 정통성과 보편성이 있음을 보이고자 교회사 및 교리사를 무진장 강조했다. 유세비우스는 비록 당시의 집권세력 콘스탄틴 대제의 총애를 누리면서 그의 자서전도 저술할 정도로 정권에 영합한 역사가로 매도되는 경향도 있었으나 그리네우스는 그런 당시의 역사적 정황보다 유세비우스가 글로 담아낸 역사와 교리의 진정성 때문에 전집 출간을 단행했다. 바젤 대학의 교리적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 전집 전체가 바이에른 도서관에 떴다. 스캔상태 별루지만 소장가치 충분하다. 공짜잖아~~~ㅋㅋ

Eusebius, Opera omnia tomus primus, ed. JJ Grynaeus (Basilea, 1570)
Eusebius, Opera omnia tomus secundus, ed. JJ Grynaeus (Basilea, 1570)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9)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죄인'이란 사실을 전제로 타인과의 교제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간사하고 포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인간의 소멸될 수 없는 창조적 존엄성은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존중해야 하고, 아무리 진실하고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성의 타락 때문에 사기와 배신과 타락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다. 즉 한 영혼이 천하보다 분명히 귀하면서 그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되어 있다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진실의 엄연한 공존 때문이다.

이런 전제로 이웃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신학적, 심리적, 정치적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교제의 대상으로 제한하는 것과 구별된다. 신학적 논적이나 다른 성격의 소유자나 정치적 반대파라 할지라도 교제의 삼팔선을 긋는 행위는 최종적인 판단이 되어야 하고 그런 교제의 단절이란 극단적인 조치 후에라도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인간의 태생적 존엄성에 기반한 이웃이란 관계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원수라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택자로 발견될 가능성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웃의 개념은 친구의 개념보다 넓다.

둘도 없는 단짝으로 밀착교제 관계를 일평생 맺어온 친구라 할지라도 죄인인 이상 언제든지 황당하고 믿을 수 없는 배신의 등짝을 돌릴 가능성이 있다. 가까이 지내면 서로의 허물과 연약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이가 된다. 그래서 가까이 지낼수록 배신의 칼은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은 뛰어난 정보 취득력을 발휘해서 '고급' 인맥을 두루 장악하고 그래서 나중에 혹 수가 틀어질 경우에 꺼낼 카드를 준비하는 노후보장 행위가 아니다. 지식에는 그 만큼 보호하고 도와야 할 사랑의 책임이 수반되는 일이다. 어떤 타인의 은밀한 지식을 취하도록 그와의 근거리 교제를 허락하신 주님의 뜻은 사랑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사회의 근간이 무너진다. 밀착교제 개념은 소멸된다. 가슴을 열고 진실을 소통하는 분위기는 냉각된다. 아무리 가까워도 남남이다. 친구나 이웃의 개념은 겨우 지갑의 윤택과 관계할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인간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적 전제가 소멸된 약육강식 사회에서 해법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고 무모하다. 여기에 교회의 존재감이 발휘될 자리가 있다. 교회는 아무리 은밀하고 깊은 속사정을 나누어도 불안하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요 진리의 터와 기둥이다. 사랑과 진실이 소멸되면 교회의 정체성은 분해되고 사회의 터와 기둥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비록 배신의 깊숙한 상처가 예상된다 할지라도 교회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유일한 마지막 계명이 준수되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겠다. 내 인생을 최악으로 몰아갈 속사정도 털어놓을 수 있는 신뢰 분위기를 사회에 수혈할 수 있는 마지막 소망 말이다. 허나 가장 큰 배신의 상처가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신뢰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기에 희생적인 판단이 요청되는 일이기는 하다. 제자들의 배신을 알면서도 가장 깊숙한 것을 나누신 예수님의 판단에 동참할 용기가 쉽게 생기지는 않는다. 그래도~~~ ㅡ.ㅡ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까닭없이?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기1:9)

식민지 생활의 고달픈 표정을 아침마다 무겁게 만들고 힘겹게 교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의 돌파구가 심히 아쉬웠을 그때, 예수님은 다른 선지자나 제사장 모습과는 달리 질병을 고치시고 권능을 행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셨다.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그에 대한 소문은 땅끝까지 이를 듯하였다. 예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믿어 그가 가는 곳마다 몰려든 무리들이 연출한 인산인해 현상은 낯설지가 않았다. 그들의 그런 추종에는 까닭이 없지 않았다. 영혼의 골수를 관통하는 주님의 송곳평에 따르면,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무리들의 추종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고달픔의 발로라는 메가톤급 애환을 모르시지 않았을 주님께서 내린 결론은 차갑고 냉담했다. 그렇다고 주님의 판단에 토를 달거나 인위적인 마사지를 가하는 건 피조물의 도리가 아니며 오히려 무례한 나댐이다.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란 주님의 언급이 마치 '주린 돼지'를 책망하는 듯하여 불쾌한 저항감이 유발되는 이유는 주께서 뜻하시는 떡의 범위가 우리의 생각보다 넓어서다. 사실 주님의 지적은 물리적인 떡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떡 먹고 배부른 것'은 이적을 행하시는 주체가 누구냐는 물음도 없이 그저 그에게서 발휘된 효력이나 효과에 만족하는 것을 일컫는다. 만족은 언제나 지향의 중단이다. 더 이상 묻지를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둔 곳에 우리의 물음도 머문다.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 머무는 곳에서 물음도 중단된다. 마음의 눈이 떡으로 어두우면 배부른 까닭으로 움직인다. 배가 신이고 떡이 안식처다. 그곳에서 만족하고 안주한다. 참 단순하다.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을 꼬집으신 주님의 심중에는 우리로 인간의 본질과 성향을 돌아보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먹고 배불러야 할 산 떡은 주님 자신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우리의 본성적인 주림을 해소할 수 없어서다. 물음의 중단과 만족의 처소는 주님 자신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지으신 자에 대한 주림이 없다. 배가 고파야 의지가 생기는데, 의지의 중단은 늘 썩어 없어지는 것들의 포만으로 좌우된다. 만물과 역사를 지으시고 이끄시는 주님 자신이 모든 것과 일에서 궁극적인 떡으로 추구되지 않는다면, 사단이 하나님께 욥에 대하여 건낸 '욥이 어찌 까닭없이 경외하리이까' 참소에서 자유로울 자가 없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 나의 사모할 자 주님 밖에는 없다는 시인의 노래가 너무도 절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