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까닭없이?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기1:9)

식민지 생활의 고달픈 표정을 아침마다 무겁게 만들고 힘겹게 교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의 돌파구가 심히 아쉬웠을 그때, 예수님은 다른 선지자나 제사장 모습과는 달리 질병을 고치시고 권능을 행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셨다.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그에 대한 소문은 땅끝까지 이를 듯하였다. 예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믿어 그가 가는 곳마다 몰려든 무리들이 연출한 인산인해 현상은 낯설지가 않았다. 그들의 그런 추종에는 까닭이 없지 않았다. 영혼의 골수를 관통하는 주님의 송곳평에 따르면,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무리들의 추종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고달픔의 발로라는 메가톤급 애환을 모르시지 않았을 주님께서 내린 결론은 차갑고 냉담했다. 그렇다고 주님의 판단에 토를 달거나 인위적인 마사지를 가하는 건 피조물의 도리가 아니며 오히려 무례한 나댐이다.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란 주님의 언급이 마치 '주린 돼지'를 책망하는 듯하여 불쾌한 저항감이 유발되는 이유는 주께서 뜻하시는 떡의 범위가 우리의 생각보다 넓어서다. 사실 주님의 지적은 물리적인 떡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떡 먹고 배부른 것'은 이적을 행하시는 주체가 누구냐는 물음도 없이 그저 그에게서 발휘된 효력이나 효과에 만족하는 것을 일컫는다. 만족은 언제나 지향의 중단이다. 더 이상 묻지를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둔 곳에 우리의 물음도 머문다.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 머무는 곳에서 물음도 중단된다. 마음의 눈이 떡으로 어두우면 배부른 까닭으로 움직인다. 배가 신이고 떡이 안식처다. 그곳에서 만족하고 안주한다. 참 단순하다.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을 꼬집으신 주님의 심중에는 우리로 인간의 본질과 성향을 돌아보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먹고 배불러야 할 산 떡은 주님 자신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우리의 본성적인 주림을 해소할 수 없어서다. 물음의 중단과 만족의 처소는 주님 자신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지으신 자에 대한 주림이 없다. 배가 고파야 의지가 생기는데, 의지의 중단은 늘 썩어 없어지는 것들의 포만으로 좌우된다. 만물과 역사를 지으시고 이끄시는 주님 자신이 모든 것과 일에서 궁극적인 떡으로 추구되지 않는다면, 사단이 하나님께 욥에 대하여 건낸 '욥이 어찌 까닭없이 경외하리이까' 참소에서 자유로울 자가 없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 나의 사모할 자 주님 밖에는 없다는 시인의 노래가 너무도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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