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9)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죄인'이란 사실을 전제로 타인과의 교제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간사하고 포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인간의 소멸될 수 없는 창조적 존엄성은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존중해야 하고, 아무리 진실하고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성의 타락 때문에 사기와 배신과 타락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다. 즉 한 영혼이 천하보다 분명히 귀하면서 그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되어 있다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진실의 엄연한 공존 때문이다.

이런 전제로 이웃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신학적, 심리적, 정치적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교제의 대상으로 제한하는 것과 구별된다. 신학적 논적이나 다른 성격의 소유자나 정치적 반대파라 할지라도 교제의 삼팔선을 긋는 행위는 최종적인 판단이 되어야 하고 그런 교제의 단절이란 극단적인 조치 후에라도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인간의 태생적 존엄성에 기반한 이웃이란 관계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원수라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택자로 발견될 가능성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웃의 개념은 친구의 개념보다 넓다.

둘도 없는 단짝으로 밀착교제 관계를 일평생 맺어온 친구라 할지라도 죄인인 이상 언제든지 황당하고 믿을 수 없는 배신의 등짝을 돌릴 가능성이 있다. 가까이 지내면 서로의 허물과 연약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이가 된다. 그래서 가까이 지낼수록 배신의 칼은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은 뛰어난 정보 취득력을 발휘해서 '고급' 인맥을 두루 장악하고 그래서 나중에 혹 수가 틀어질 경우에 꺼낼 카드를 준비하는 노후보장 행위가 아니다. 지식에는 그 만큼 보호하고 도와야 할 사랑의 책임이 수반되는 일이다. 어떤 타인의 은밀한 지식을 취하도록 그와의 근거리 교제를 허락하신 주님의 뜻은 사랑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사회의 근간이 무너진다. 밀착교제 개념은 소멸된다. 가슴을 열고 진실을 소통하는 분위기는 냉각된다. 아무리 가까워도 남남이다. 친구나 이웃의 개념은 겨우 지갑의 윤택과 관계할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인간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적 전제가 소멸된 약육강식 사회에서 해법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고 무모하다. 여기에 교회의 존재감이 발휘될 자리가 있다. 교회는 아무리 은밀하고 깊은 속사정을 나누어도 불안하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요 진리의 터와 기둥이다. 사랑과 진실이 소멸되면 교회의 정체성은 분해되고 사회의 터와 기둥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비록 배신의 깊숙한 상처가 예상된다 할지라도 교회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유일한 마지막 계명이 준수되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겠다. 내 인생을 최악으로 몰아갈 속사정도 털어놓을 수 있는 신뢰 분위기를 사회에 수혈할 수 있는 마지막 소망 말이다. 허나 가장 큰 배신의 상처가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신뢰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기에 희생적인 판단이 요청되는 일이기는 하다. 제자들의 배신을 알면서도 가장 깊숙한 것을 나누신 예수님의 판단에 동참할 용기가 쉽게 생기지는 않는다. 그래도~~~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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