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우선순위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22:1). 한참동안 의식의 발목을 붙잡은 구절이다. 읽으면서 유신론의 고품격 가치보다 유물론이 발산하는 괴이한 매력에 합당한 저항을 접고 백기투항 하는 일부 기독교의 현주소가 보여서다.

위의 구절은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 문제에 더 가깝다. 만물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향유의 대상(fruenda), 향유 및 사용의 대상(fruenda et utenda), 그리고 사용의 대상(utenda). 각각의 가치에 대응하는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 인간, 다른 피조물 순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우리의 즐거움이 머무는 종착지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나의 기쁨이요 즐거움이 되신다고 한 시인의 고백에서 입증된다.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달리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자랑치도 않겠다고 했다. 

인간도 향유의 대상이다. 타인을 자신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아니된다. 그런데 왜 동시에 사용의 대상인가? 인간이 향유의 궁극적인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향유하는 최고의 통로이다.

다른 피조물은 결코 향유 혹은 즐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은이나 금보다 더 우리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향유의 대상인 하나님을 물질과 맞바꾼 것이겠다. 우상숭배 행위가 따로 없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차분한 어조로 격분했다.

피조물을 향유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경배의 대상일 수 없다는 십계명 1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일례로, 하나님의 명령보다 흠없는 양의 울음에 귀가 즐거웠던 사울이 비록 하나님 경배를 목적으로 양을 아꼈어도 사술의 범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이 유신론을 때때로 앞도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재물취득 방편으로 거리낌 없이 동원한다. 이는 신앙과 삶과 창조의 질서를 뒤집는 일이겠다. 이러한 질서의 전복은 이단의 전형적인 작태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고 인간의 가치를 재물로 교체하고 재물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호명한다. 

교회가 이런 무질서의 대표적인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선 형국까지 치달은 건 아닌지 뜨끔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참된 명예와 그분만을 기쁘시게 하여 입는 은총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인 가치로 끝까지 고수하는 증인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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