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다윗의 처신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삼하16:10)

간음과 살인의 주범인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칼을 피하여 도피하는 중이었다. 충신들과 백성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사울가의 사람 시므이가 정색을 하고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즉 1) 다윗은 왕이었던 사울을 살해하고 권좌를 찬탈하려 했고, 2)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징벌하는 차원에서 나라를 다윗의 손에서 빼앗아 반역자 압살롬의 손에 넘기고자 하셨으며, 3) 다윗은 '벨리알의 사람'이기 때문에 '꺼지라'는 독설까지 내뿜었다. 그러나 전부가 사실 무근이다.

첫째, 다윗은 권세에 눈이 어두워 사울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그마한 옷자락 한 조각의 제거로도 죄책감에 시달렸던 인물이다. 둘째,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윗의 손에서 압살롬의 손에 넘기고자 한 적이 없으시다. 셋째, 다윗에게 돌려진 '벨리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호칭이며, '꺼지라'는 말도 몰락한 시므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아니되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에게는 극도로 부당한 망언이다.

무자격자 입에서 사실과 무관하게 출고된 저주를 들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죽은 개'와 같은 시므이의 무엄한 악담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목을 베겠다고 나셨다. 이는 누가 보아도 지극히 충신다운 반응이요 지극히 정당하고 상식적인 처신이다. 그러나 저주의 대상인 다윗의 해석은 상이했다. 시므이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으며, 그가 저주하는 것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시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면서 관계성의 묘한 선긋기에 들어갔다. 심지어 자신의 충신들을 향해 '사탄'이란 표현도 불사했다.

말씀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죽은 개'와 '벨리알의 사람'과 '사탄'이란 부정적인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이 상황에 한국교회 현실이 묘하게 중첩된다. 교회의 지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 간음이나 살인을 저질르면 무수한 목소리가 이 사실을 지적한다. 과하게 격분한 목소리는 '벨리알의 사람'이란 호칭을 투척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사실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다. 이에 대하여 그 지도자의 충신들은 사실에 근거하든 안하든 사실을 발설한 모든 목소리를 '죽은 개'의 짖음을 규정하고 목을 제거하려 앞다투어 달려든다.

사태가 이 정도로 발전하면 지도자는 다윗처럼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충성심 차원에서 발동한 측근들의 격분을 조기에 진압하며 적당한 선긋기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오히려 측근들의 충성심을 부추기고 측근들 선에서 사태가 해결되길 은근히 바라면서 어떻게든 엮이지 않으려고 교활한 침묵이나 비겁한 은둔으로 응수한다. 측근들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으면 무고죄를 들먹이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발설한 입술까지 고소고발 조치에 돌입한다. 법적인 면죄부가 발부되기 전까지는 철회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되, 고소의 철회가 넉넉한 관용으로 둔갑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 마치 아량을 베풀듯이 고소장을 보란듯이 찢는 가증함도 연출한다.

사람은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도 저지른다. 그러나 인품과 신앙의 격은 그 사실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에서 좌우되는 법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했던 사람이다. 품행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최고의 자격을 갖춘 선지자 나단의 따끔한 지적만이 아니라 지극히 무자격한 사람 시므이가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은 방발을 일삼는다 할지라도 그런 가까운 원인에 반응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과 그의 의도를 의식하며 읽어내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그의 정직과 겸손과 온유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다윗의 이런 처신이 심히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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