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일 토요일

거룩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8:13).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거룩"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적인 구별성을 가리키는 말로 "완전히 다른 자" 혹은 "전적인 타자"(das ganz Andere)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즉 돼지의 발굽이 뚜렷하게 갈라진 것처럼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명확한 존재론적 구별이 바로 거룩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에는 다른 어떠한 존재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신적인 고유성이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나 교회의 긴 역사에서 확인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된 분으로 여기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연을 신으로, 때로는 벌레나 짐승을 신으로, 때로는 자신을 때로는 어떤 영웅을 신의 고유한 자리에 앉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혼란한 무질서 조장은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고 불경스런 짓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부정하는 짓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고...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진단하며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결코 핑계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존재론적 구별을 가리키는 거룩은 "완전한 순결"의 개념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하고 무흠하신 분입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흠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어떠한 결함도 없고 결핍도 없는 완전한 분입니다. 신적인 속성과 뜻과 계획과 행하심이 완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가감할 수 없으며, 뜻도 가감할 수 없으며, 정하신 계획도 가감할 수 없으며, 행하심도 가감할 수 없습니다. 욥기의 기록처럼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고 아무리 선하여도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단 한 조각의 인간적인 의지나 기호도 섞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은 누구도 변경할 수 없으며 반드시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행은 모든 선들의 출처이신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어떠한 공로도 인간에게 돌려서는 안됩니다. 비록 인간의 생각과 기호와 소원과 수족이 선행에 결부되어 있지만 그것은 선행에의 은혜로운 초청과 영광스런 동참일 뿐이며 선의 주체성을 인간에게 돌릴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뜻과 도모와 행실이 선행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할수록 선행의 순수성은 거기에 비례해서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라"라고 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는 것이 피조물의 마땅하고 필연적인 도리이기 때문에 명하여진 것입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는 우리의 태도로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에 무지하고 그렇기 때문에 경외해야 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두려움과 경외의 신이라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잔인한 원수나 독재적인 신으로 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과 공의, 자비와 정직, 평강과 경외심은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배타적인 대립항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화와 균형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만약 경외심이 없는 사랑과 긍휼 일변도의 태도로만 하나님을 대한다면, 그렇게 이해된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계신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기호에 의해 가공된 하나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가 경외해야 할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고 무서워할 자로 삼아야 한다는 이사야의 교훈에 작금의 교회는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에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그저 두려워서 떠는 상태에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즉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지식은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당위나 필연과도 같습니다. 존재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과 무관하게 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론적 고유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 "완전한 순결"의 전방위적 요구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뜻과 생각과 계획과 말과 행실에 세상과는 구별된 기준과 규범과 질서와 원리와 동기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의 원대로 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늘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존중하고 그것에 맞추어 늘 조율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도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당위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뜻과 생각과 계획과 말과 행위를 하나님께 맞춘다고 하더라도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몫입니다. 바울의 교훈처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에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만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거룩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는 우리 편에서의 노력이나 연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뜻과 생각의 거룩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것이 인정되고 만큼 커집니다. 언어와 행실의 거룩도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이 우리의 것을 대체하는 만큼 커집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실질적인 거룩의 가능성도 주님의 거룩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을 경시하고 거룩에의 참여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세상과 같아지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비록 기독교의 종교적인 언어와 행습으로 포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슬프게도 세상이 추구하는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지금 교회에는 돈 때문에 분란과 분열이 발생하고 목회자에 의해 음행의 문제가 발생하고 많은 성도들이 경건을 이익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성경을 자의로 해석하고 진리보다 귀에 달콤한 교설을 강단에서 쏟아내는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마치 거룩의 개념이 실종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부정함과 생각의 부정함과 입술의 부정함과 수족의 부정함이 도처에서 신적인 거룩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증인인 교회의 거룩함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라는 사실에 우리 개개인과 온 교회가 경각심을 가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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