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8일 토요일

라무스 논리학 계속

모든 가르침은 일반에서 특수로 이동한다. 삼단논법 역시 동일하다. 다만 정의와 분배 혹은 분할에 의해 작동한다. 용어가 정의된 이후에는 부분들로 분할된다.

라무스의 특이한 점은 이렇다. 그는 변증을 잘 논술하는 기술이라 하였는데 그것의 부분들이 inventio와 iudicium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다. 라무스는 이분법적 테이블 만드는 것에 만족하고 통합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사이의 기본적인 구분에 대해서는 해명을 회피한다. 

라무스의 애매성에 대한 혐오와 추상주의 및 수학에 대한 극렬한 찬사는 고대 플라톤 사상의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 

종(Genus)은 모든 부분들에 대해 본질적인 것들의 전체이다. 특별한 개체들은 종의 부분이다. 동물은 개별 동물들의 종이다. 인간의 개별 인간들의 종이다. 인간의 동물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개별전인 존재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증의 연쇄성은 라무스 방법론의 특징이다. 

플라톤은 사물들의 통일성을 보증하는 일종의 연쇄적인 변증과 결부되어 있다면 아리스토 경우에는 분할과 결부된다. 라무스가 이런 관계성을 주장한다. 

라무스는 유명론자 혹은 실재론자? 사물들 자체 외에는 모든 것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라무스의 변증학은 보편적 개념이 실재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유명론적 교리를 암시하는 듯하고, 동시에 마음의 내용들이 구별된 대상들과 동일시 된다는 면에서는 보편이 우리의 의식 밖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실재론적 교리를 암시하는 듯하다. 

보편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사물의 세계에 있는가? 라무스는 침묵하는 입장,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에 판단하기 곤란하다. 


2012년 2월 17일 금요일

아들과의 대화 2

오늘도 아들을 태우고 학교로 핸들을 돌렸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타자마자 내가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아빠: 아들아, 아빠가 오늘은 예수님이 죽으신 장면을 읽었단다. 많은 생각이 들더구나.

아들: 아빠, 그런대요~ 예수님이 아프시고 슬퍼하고 죽으시는 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아요. 거기에 보면 신들이 화내고 싸우고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잖아요.

아빠: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사실 비슷하지.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는 달리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단다. 죄 말고는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으시지. 그리고 걔네들은 그리스 사람들의 힘샌 아바타에 불과해. 그렇다고 예수님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바타로 보면 안되는 거 알지?

아들: 그런데 아빠, 창세기에 보면 사람들이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후회도 하잖아요. 그때는 사람으로 오신 것도 아닌대.

아빠: 물론 그렇지.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 전에도 우리에게 늘 가까이 오셨고 가까이 계셨단다. 구약에서 관찰되는 하나님이 마치 그리스 신들처럼 보이는 것은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소통하신 방식이기 때문에 비슷한 것이지 본질은 전혀 다르단다. 하나님은 몸으로 오시기 전에도 우리에게 가까이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실 때에 전혀 새로운 계시를 보이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게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하신 거란다.

아들: 아빠, 이것도 궁금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슬퍼하고 후회하고 우시고 그러세요?

아빠: 네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계획하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란다. 그런데도 마치 몰랐던 것을 알고 경험하신 것처럼 인간적인 감정을 보이시는 게 이상할 수 있겠구나. 아들아, 성경을 자세히 보면 늘 두 가지가 동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단다. 세상을 창조하신 동시에 그것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명령의 방식으로 전달하신 동시에 그것에 대한 사람의 반응에 일일이 개입하며 소통하고 계시다는 것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늘 가까이 하시는데 당신의 마음과 뜻을 전달함에 있어서는 명령만 덜렁 던져 주지 않으시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일일이 살피면서 그것에 대해 반응을 해 주시므로 더 깊은 소통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거란다. 슬퍼하고 후회하고 우시는 건 하나님이 무능하고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얘기지. 지금은 다 알지 못하겠지. 아직 어리니까 괜찮다. 말이 길었지만 한 마디만 더 해줄께. 그리스 신화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하나님은 무조건 그것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반응일 수 있단다. 그리스 신화가 구약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모습을 카피했을 수도 있거든. 일종의 페러디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지. 진짜 주변에는 늘 가짜가 많은 법이거든.

아들: 아빠,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요.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죄를 좋아하시는 거 아니예요? 좋아하지 않는다면, 전능하신 분이신대 다르게 계획하실 수 있는 거잖아요.

아빠: 오늘은 은진이가 질문이 많구나. 답변이 곤란해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얘기를 들으면 소화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아주 간단하게 두 가지로 답한다면 이렇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되 마치 하나님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을만큼 고매하게 만드셨고 우리의 가치를 그런 차원까지 높이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죄짓는 것까지도 허용하신 거란다. '허용'이란 말이 어렵지? 아담과 하와의 가장 높은 자유를 존중해 주셨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둘째, 죄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죄는 욕하고 나쁘게 행동하는 외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근원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을 떠난다'는 의미가 있단다. 하나님은 생명이고 하나님은 모든 좋고 올바른 것들의 주인이신 거 은진이도 알지.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런 그분을 떠난다는 건 죽음이고 모든 나쁘고 그릇된 것들만 알고 행하게 된다는 뜻이겠지. 이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정말 '나를 멀리 멀리 떠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을까? 만약 그것을 좋아하신 분이라면, 어떻게 자신이 창조한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말이 안되잖아. 하나님은 늘 선하시고 옳으신 분이시고 당연히 악하고 그릇된 말과 행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텐데 그걸 좋아하실 리가 없잖아.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생명을 떠나 죽음으로 돌진하는 걸 즐기시는 심술쟁이 결코 아니거든.

아들: 하하하...아빠, 천사들은 순종만 하잖아요. 그런 왜 마귀가 되었어요?

아빠: 천사들~~ 그분들에 대해서는 아빠가 큰 관심이 없는데....ㅎㅎㅎ 성경을 보면 천사들은 로보트가 아니라 '뢰셔널 비잉'으로 분명히 묘사되고 있단다. 의지도 있고 생각도 하고 하나님 및 인간과 소통도 하는 존재라는 얘기다. 물론 하나님과 늘 대면하고 있다고 하니 하나님 면전에서 함부로 죄를 지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성경은 천사도 자신의 의지를 따라 타락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단다. 땅의 일들도 잘 모르는 우리의 지적 수준을 잘 아셔서 그런지, 하나님은 성경에 천사들을 비롯한 하늘의 상황을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신 것 같다. 성경이 열어준 그 만큼만 보면 된다는 의미겠지. 그러니 너도 아빠처럼 그분들에 대해서는 너무 지나친 호기심 갖지 말거라.

아들: 와~ 재밋다. 아빠, 다 왔어요.

아빠: 오늘은 짧은 시간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네.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공부 열심히 해. 학교에선 선생님이 대장인 거 알지? 아이라뷰~~

아들: 아이러뷰 투~~ 아빠! 바이~~

십자가의 역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아주 많이~~ 승리가 실패일 수 있고 실패가 승리일 수 있어서다.
이는 중국의 새옹지마 개념과는 다른 역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어떤 것이었나?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거기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노라.'
 여기에 그들은 궁시렁 멘트 한 마디를 덧붙인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면
이제 구원하실 게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랬거든' 

십자가의 죽음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아들됨을 인정해 주겠단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신 증거란다.
여기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도 그를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는 상황이다.
허나 예수님은 이런 사면초가 상황의 원흉들에 대해 일언반구 없으셨다.
민중의 기대감을 해아리지 못하였고
그런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성 여론이 조성되어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예수님께
호의적인 마음의 소유자들마저 등돌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면 다 밝혀질 거야'라는 변호의 한 마디도 내뱉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군중이 묻는 물음과 기대감은 묵살되고 말았다.
열두 영보다 많은 천사들 중 소수의 선발대만 파견해서
십자가를 몽둥이로 삼아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능멸하며 깐죽댄
군병들과 군중들을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팰 수도 있었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냥 죽으셨다.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 주셨다.

이는 군중들의 기대와 물음에 반응하는 결정이 아니셨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 하셨던 자의 불가해한 고집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특이하다.
그들은 '그 증거가 참'이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감을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지를 못한다.
자신들도 모르는 피상적인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보내신 이의 뜻 이루는 것을 접는다면 그것보다 큰 실패는 없을 것이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이 아니라 동일하게 썩지도 않는
불량식품 때문에 사는 인생으로 전락하니
이보다 더 처참한 낭패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교회가 주님의 보냄을 받았다면
주님의 뜻 이루는 일에 착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도덕적 평균치 주변에서 이르지 못하는 교회들도 있어
세상의 빛은 고사하고 세상의 신음과 탄식을 더 깊게 만드는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바늘 크기의 구멍만 있더라도
숨고 싶어하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 교회가 당장 풀어야 할 당면과제 외면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만 가자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들이댄 잣대에 겨우 턱걸이한 수준에
혹 이르렀다 할지라도 모가지 뻗뻗한 교만과 자만의 자리로
곧장 달려가진 말자는 얘기다.
세상의 비판과 혹평의 입을 틀어막는 게 교회의 도리인 것처럼은
착각하며 살지는 말자는 얘기다. 
이에 대하여는 억울함이 진정한 성공의 첩경일 수 있겠다...

라무스의 변증학 in Dialecticae institutiones

Dialecticae institutiones는
라무스의 변증학과 그의 사상 전체가 형성되는 메트릭스 문헌이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변증학의 기원, 변증학의 기술 혹은 가르침, 및 변증학의 실행
(natura, doctrina or ars, and excercitatio)이다.

1. Natura dialecticae: 라무스는 변증학을 담화의 능력, 혹은 논의하는 힘이라고 규정한다.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disserendi)는 것의 라무스적 의미는 '대화하다', '논쟁하다,' '식별하다,' '이성을 사용하다' 등과 동일하다. 이처럼 이성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사유와 연결되지 않고 말하는 것과 관계된다.Cf. Thomas Spencer는 To discourse is the declare one thing that is lesse knowne, by another thing that is more knowne (The Art of Logicke, p.7)이라 했다. 스펜서의 금언 하나 추가하자. The more logicall a man is, the more is he like a man, and the lesse logicall, the lesse like a man who is a reasonable Creature. If this be true (as it is most true) then must it be granted that the precepts of this art, are profitable for the vse of man in the highest degree. 이는 독자서문 3번에 나오는 내용이다.

2. 탁월한 웅변가 혹은 저술가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플라톤의 Phaedrus
유사 키케로의 Rhetorica ad Herennium
퀴틸리아누스의 Institutio oratoria

3. 라무스의 문맥에서 Natura는 작용의 본질 혹은 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natura dialecticae 및 naturalis dialectica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태생적 변증학'을 의미하며 플라토닉 방식으로 말하자면, "성향, 이성, 마음, 하나님의 형상, 및 영원한 빛을 필적하는 빛을 가리킨다." 이런 라무스의 이해는 아그리콜라 이전의 스콜라적 논리학자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나아가 라무스는 '변증학의 기술은 자연적 변증학을 모방하고 연구하여 발전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4. 기술은 말하기와 관련해서 발생되는 것이라면 말하기는 전적으로 교사의 독차지다. 라무스의 논적 아드리엔 투네베(Adrien Turnebe)는 그리스 사람들이 변증학을 사유나 추론이나 주제 설정하는 것과 결부되지 않고 말하기와 결부시킨 것을 강조했다.

5. Dialectica as Ars or doctrina: 라무스의 변증한 개념은 키케로 개념의 확장이요 세련된 형태를 입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변증학이 '잘(bene)' 담화하는 기술로 규정한 것은 태생적인 변증학과 변증의 '기술' 사이의 차이를 가리키기 위함이다. 변증의 기술을 탁월하게 연마하는 것과 관련해서 습관(habitus) 혹은 습성 혹은 취득된 기술이 중요하게 사려된다.

6. 변증의 기술(ars dialecticae)은 태생적인 변증(natura dialecticae)과 관계된다.

7. 변증의 기술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주제 설정하기 및 배열하기. 라무스는 아그리콜라가 따르던 키케로/아리스토 전통를 따라 변증을 명백하게 형식화된 문제들을 푸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라무스는 모든 논리학과 변증에서 범주들과 서술들에 대한 논의를 제거하고 주제별 논의만을 선호했다.

8. Inventio: 라무스의 종류별 논제들 혹은 소재들(generic arguments)은 14가지:  causes, effects, subjects, adjuncts, disagreeings, genus, form, name, notations, conjugates, testimonies, contraries, distributions, definitions.

9. Judicium or Syllogismus: 라무스의 판단(judicium)은 아래와 같이 세 가지의 단계로 구성된다. 이러한 삼단계 판단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정작 판단(judicium) 자체는 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세나 근대의 형식 논리학이 관심을 보이는 '명제'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삼단논법(syllogism) -- 주장의 연쇄(concatenation of arguments) -- 종교(religion)

10. 첫번째 단계(syllogism)에서 하나의 주장이 하나의 질문과 견고하게 매치되고 그래서 질문 자체는 true or false로 인식된다. 이러한 배열(dispositio)가 바로 삼단논법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주장에 하나 발견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물음과 결부된다. 라무스는 전통적인 shsqjqdmf 이탈하여 주어와 술어의 개념을 첫번째 용어와 두번째 용어라는 말로 대체하여 시공간적 효과를 강화한다.

11. 삼단논법 구조에서, 첫번째 것(대전제)을 propositio, 두번째 것(소전제)은 assupmtio, 결론은 complexio라 하였다. 라무스식 삼단논법 사례: 라무스의 귀납법은 참으로 이상하다.

       Propositio: 모든 동물들은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Assumptio: 모든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은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Complexio: 모든 동물은 사람 아니면 동물이다.

12. 두번째 단계(beginnings of method): 많은 주장들을 서로 일관된 것들을 엮고 배열하는 단계이다. 이 부분을 Ramist Method라 부른다. 이 단계는 끊임없이 정의하고 분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되 끊어지지 않는 연쇄를 만들어 하나의 설정된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13. 세번째 단계(religion): 이것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은 동굴의 그늘에서 해방되며 모든 것들은 거룩한 빛 즉 하나님을 가리키게 된다고 라무스는 주장한다. 이는 그가 이후에 다루는 변증의 내용과 연관성이 떨어지며, 다만 라무스 자신의 변증에 플라톤 사상의 윤택을 입히고 아리스토 추종자들이 가진 상처에 소금을 문질러 넣는 행위라고 Ong 아재는 평가한다.

14. 라무스는 철학과 변증학과 물리학과 윤리학 중에서 우리의 마음이 안내자로 삼아야 할 것은 변증학이라고 주장한다. 변증으로 말미안아 마음이 하나님께 이르는 것은 혹자로 하여금 버질이 우주를 그 안에서 부양하고 있다고 말한 영에 이르는 것이며, 플라톤의 세계정신에 이르는 것이며 스토아의 섭리에 도달하게 한다고 라무스는 말한다.

15. 그리고 라무스는 물리학, 산술한,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실재적인 변증으로 변형될 때에 존재하며 그 모든 교과과정 과목들의 흠결없는 통화를 통하여 마음은 하나님께 도달하게 된다고 말한다.

16. Dialectic as Usus or Exercitatio: 이 세번째 파트에서 변증의 기술은 삶으로 적용된다. 기술이 그 자체로는 죽은 표면이요 생명력 없는 교훈들의 그물망일 뿐이다. 라무스는 아리스토 형이상학 같은 것보다 플라톤의 Republica와 키케로의 De natura deorum을 선호한다. 왜냐? 다양한 사실들과 의견들을 제공하며 설명하는 'discursive논설적인'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17. 라무스의 말이다. "인간의 삶 전체는 이성의 사용 즉 태생적인 변증의 실행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삶 전체의 자원을 이 이성의 기술 혹은 본성적인 변증의 기술을 연구하고 활용하는 일에 동원하자. 기술은 교훈들을 통해 알려지는 것보다 실행을 통해서 더 잘 알려진다. 우리는 이러한 실제적인 실행에 익숙한 노인들을 공경해야 한다."

18. 라무스의 본성적인 변증 개념은 학문적/심리학적 설명으로 입증되지 않고 실천하는 방식으로 해명되는 것이다. 먼저 교실에서 실행된다.

19. 철학자는 강압적인 기억술을 사용하나 라무스는 외적이고 그림과 같이 명시적인 기호들과 표상들을 배열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라무스가 주장하는 기억술이 가장 기본적인 기초는 '사물들 자체 안에 발견되는 질서'이다.


Ramus의 Dialectic in Aristotelicae Animadversiones (1543)

라무스의 새로운 변증학은 먼저 두 문헌에서 정립된다. Aristotelicae Animadversiones:  아리스토 Organon에 대한 독설을 담은 문헌이다. Dialecticae institutiones (1543): 이것은 대단히 특이한데 애매한 아그리콜라 변증학을 정립하되 키케로적 심리학 안에서의 정립을 시도한 문헌이다. 

Aristotelicae Animadversiones를 보자.

1. 라무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최초의 철학자로 간주한다. 그가 발견한 불은 인위적인 지혜(artificiosa sapientia)이다. 어떤 변증적인 원리들(quaedam cica dialecticam principia)로 말미암아 지혜는 학문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 프로메테우스, 제노, 소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아리스토 이전 철학자들은 실재적인 변증학을 따랐는데 그 중에서 플라톤이 변증학 혹은 철학의 절정에 이른 인물이다. 그러나 아리스토가 플라톤을 계승할 때에 변증학적 진리와 실천은 부패하게 되었단다. 물론 그 부패의 원흉은 아리스토 자신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라무스는 아리스토 자신이 지금은 유실된 자신의 문헌에서 변증학을 비공식적 방식으로 활용하여 그것을 부요하게 만든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 Ong 아재의 생각이다.

3. 라무스는 변증가들 혹은 철학자들 무리를 '본성을 따르는 좋은 자들'과 '아리스토 철학의 거짓된 기술을 따르는 나쁜 자들'로 구분한 이후에 아리스토 Organon 안에 표상된 변증의 잘못된 기술과 실천을 먼저 사려한다.

4. 라무스는 아리스토 문헌들 중에 Categories와 Topics I-VII 및 폴피리의 Introduction을 발견(invention)과 연관짓고, On Interpretation과 Prior Analytics와 Posterior Analytics를 형이상학 영역으로 묶어 판단(judgment)과 연관짓고, Organon 나머지 부분은 Topics VIII과 Sophistical Argumentation은 변증학의 사용과 연관을 지었다. 물론 라무스의 논적들(Gouveia, Riolan, Charpentier, Schegk)은 아리스토 문헌들을 라무스적 변증학의 구미에 맞도록 재편한 것에 맹공을 퍼부었다. 

라무스는 폴피리의 Introduction에서 그가 자신의 설명을 왜곡하고 있으며, 특별히 species와 같은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서 이탈하고, 변증학에 문법을 도입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Categories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척하지만 그것들을 혼돈과 잠재성 속에서만 다룰 뿐이라고 주장한다. Topics는 주장들을 발견하는 소재들(locis argumentorum inveniendorum)을 제공하나 심각한 혼동을 일으키고 7권의 책들 각권에서 네 가지의 질문 What are the accidents? the Genus? the properties? the definition? 만 되풀이할 뿐이라고 일갈한다. Rhetoric에서 아리스토는 발견의 세 가지 방식 즉 원인 보편적인 주장, 그 둘 사이의 어떤 것을 지정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