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7일 금요일

십자가의 역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아주 많이~~ 승리가 실패일 수 있고 실패가 승리일 수 있어서다.
이는 중국의 새옹지마 개념과는 다른 역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어떤 것이었나?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거기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노라.'
 여기에 그들은 궁시렁 멘트 한 마디를 덧붙인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면
이제 구원하실 게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랬거든' 

십자가의 죽음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아들됨을 인정해 주겠단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신 증거란다.
여기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도 그를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는 상황이다.
허나 예수님은 이런 사면초가 상황의 원흉들에 대해 일언반구 없으셨다.
민중의 기대감을 해아리지 못하였고
그런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성 여론이 조성되어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예수님께
호의적인 마음의 소유자들마저 등돌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면 다 밝혀질 거야'라는 변호의 한 마디도 내뱉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군중이 묻는 물음과 기대감은 묵살되고 말았다.
열두 영보다 많은 천사들 중 소수의 선발대만 파견해서
십자가를 몽둥이로 삼아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능멸하며 깐죽댄
군병들과 군중들을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팰 수도 있었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냥 죽으셨다.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 주셨다.

이는 군중들의 기대와 물음에 반응하는 결정이 아니셨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 하셨던 자의 불가해한 고집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특이하다.
그들은 '그 증거가 참'이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감을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지를 못한다.
자신들도 모르는 피상적인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보내신 이의 뜻 이루는 것을 접는다면 그것보다 큰 실패는 없을 것이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이 아니라 동일하게 썩지도 않는
불량식품 때문에 사는 인생으로 전락하니
이보다 더 처참한 낭패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교회가 주님의 보냄을 받았다면
주님의 뜻 이루는 일에 착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도덕적 평균치 주변에서 이르지 못하는 교회들도 있어
세상의 빛은 고사하고 세상의 신음과 탄식을 더 깊게 만드는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바늘 크기의 구멍만 있더라도
숨고 싶어하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 교회가 당장 풀어야 할 당면과제 외면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만 가자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들이댄 잣대에 겨우 턱걸이한 수준에
혹 이르렀다 할지라도 모가지 뻗뻗한 교만과 자만의 자리로
곧장 달려가진 말자는 얘기다.
세상의 비판과 혹평의 입을 틀어막는 게 교회의 도리인 것처럼은
착각하며 살지는 말자는 얘기다. 
이에 대하여는 억울함이 진정한 성공의 첩경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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