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부자간의 삼위일체 논쟁

첫째와 삼위일체 논의가 벌어졌다. 머리에 아직 수본성에 대한 사색의 쇠똥이 딱딱하게 마르지 않아 다행이다. 하여 오늘은 밀리지 않았다. 물음의 꼬리를 수십개나 물고 늘어지는 녀석의 집요함을 보건대, 조만간 전비를 다진 후 덤빌 기세다. 부자간의 신학논쟁, 수위 조절이 필요해 보인다...아흠! ㅡ.ㅡ

성경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다른 분이시고 다 하나님의 호칭이 가능한데 정작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게 납득이 안간단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 사이에 어떤 서열이 있음이 분명한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등성을 고집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는 게 솔직한 물음이라 했다. 초대교회 시대에 이단으로 정죄된 분들은 성경적 지식이 없고 공의회의 탁자를 마구 뒤집는 무례와 오만으로 전철된 뿔난 괴물이 아니었다. 세상의 이치에 능통하고 상식과 논리에 출중했던 분들이다.

아들의 물음은 교회사 속에서 무수히 던져졌던 상식과 논리에 기초한 물음이고 이로 인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분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덧붙여,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 하나님과 인간, 적응적 계시 등을 중딩 1학년이 이해할 버전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래도 논쟁의 마침표는 이르다. 기냥 믿으라고 이맛살을 구길 문제는 아니었다. 진리의 전달은 은혜라는 사실을 절감한 하루였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선교의 내용

플라톤은 영혼의 최고선(summum animae bonum)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그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한다고 했다. 칼빈은 이를 인용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목적을 위해 출생하고 사는 것이라면 하나님 지식을 덧없고 무상한 것으로 돌리는 사람, 즉 생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그 지식에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creationis lege)조차 이탈하게 됨은 너무도 자명하다' 했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가 명료하게 드러난 대목이다.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율법의 하한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의 보다 중요한 의미로서 정의와 자비와 신뢰를 버린 바리새인 및 서기관 무리들을 책망하는 문맥에서 예수님의 핵심 율법관이 제시된 대목이다. 예수님의 의도를 잘 간파한 바울의 말처럼 율법의 속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하라'나 '하지마라' 형식의 명령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도 아니고 우리가 이르러야 할 삶의 지고한 가치 상한선도 아니다. 응급조치 차원에서 잠시 있다가 소멸될 시한부 규범으로 제시된 것도 아니다. 최소한 이 이상은 내려가지 말라고, 더 내려가면 삶의 기반조차 와해될지 모를 덕과 행실의 항구적인 하한선을 그어준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일례로, 십계명의 도적질 금지는 타인의 소유물을 임의로 취하지 않으면 온전히 준수되는 계명이 아니다. 바울은 도적질 금지령의 적극적 의미가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궁핍이 생계의 존립마저 위협하면 도적질은 생존의 수단으로 채택되고, 이런 상태가 사회에 문화의 딱딱한 군살로 굳어지면 도적질은 급기야 적법의 지위까지 탈환하는 거북한 수순이 이어진다. 도적질 말라는 율법은 이처럼 내가 그런 행실을 범하지 않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절박한 가난과 결핍으로 대표되는 타인의 도적질 동기까지 제거하는 구제의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율법의 보다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세간의 기독교 평가가 심히 불쾌하고 괘씸한데 반박할 근거가 희박하다. '안그러는 사람이 더 많아'라는 대응은 여전히 궁색하다. 각종 비리와 탈법의 구린내가 교회의 회계장부 갈피마다 진동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윤리의 하한선 끝자락에 손가락 몇 개로 겨우 버티는 교회의 윤리실종 사태가 처처에 횡행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고개를 드실 수가 없도록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당하신다. 사회적 질서의 평균치만 들이대도 지위나 명예의 모가지가 달아날 부끄러운 짓들이 교회에는 은밀한 관행처럼 묵인되는 태도가 마치 건덕의 최선책인 양 용인되는 건 하나님의 징계가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의와 인과 신이라는 율법의 상한선을 당연히 추구해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라 말라'는 율법의 하한선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당당하냐? 그렇지가 않다. 율법의 정죄를 피하거나 버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여 각자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돌이킴이 우선이다. 그것이 저항과 개혁의 목소리가 된다면 주의 크신 은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거짓의 원흉과 극복

그가 너를 책망하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너는 이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

짐승은 태어나서 시간이 흘러도 본능과 거리를 만드는 이성적 활동이 없다. 대신 직관이 강하다. 이런 이유로 자연적 재앙의 직관적인 감지는 대체로 짐승들의 몫이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나이가 들고 키가 자라면서 외부의 대상이나 자신의 본능에 대해 거리를 만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내감할 수 있는 능력은 짐승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짐승은 '나는 누구일까?' 이런 고민 안한다. 생존의 필요가 곧장 욕구이고 행동이다.

문제는 본성과 대상에 대해 거리를 두면 둘수록 그 실체를 지각하는 정확도도 떨어지고 직관의 현저한 희생도 따른다는 점이다. 당연히 직관적인 인식의 촉수도 둔감해져 변화에 민첩하지 못하고 때때로 오식과 악수에 시달린다. 잘못된 인식에 따른 어리석은 처방과 처신으로 만들어진 불행의 역사는 이미 산더미를 이루었다. 이를 성숙의 댓가로 보기도 하지만, 어쩌면 대상과 본성에서 멀어지는 것 자체가 성숙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도 가능한 부분이다.

난 이런 의심에 근거하여 거짓의 본질이 우리의 본성을 포함한 모든 대상들과 거리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거리 만들기의 대표적인 수단은 언어다. 언어와 생각의 우선순위 문제는 명쾌한 판별이 어렵지만 서로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물과 사태를 언어나 생각으로 번역하는 순간 우리는 그 실체에서 멀어진다. 대상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만큼, 그 대상의 실체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하다. 생각과 언어가 대체물인 경우도 그러하다.

언어의 귀재 바트겐슈타인이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가 대체로 언어의 오해와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하고, 일상언어 사용의 중요성과 분석에 투신한 것은 괴짜의 엉뚱한 발상이 아니었다. 천재의 직관이 발휘된 판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짓의 출처를 언어사용 유무 이전으로 소급한다. 즉 하나님과 거리를 만드는 것이 거짓의 본질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거짓이며 파생적인 오류일 뿐이다. '거짓'의 탁월한 전공자는 히포의 주교다. 두 권의 단행본을 생산한 인물이다: [거짓에 관하여(De mendacio)]와 [거짓을 반박하며(Contra mendacio)]

어거스틴은 거짓을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박힌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거짓은 실체에서 멀어진 거리이고, 최고의 진리시며 진리의 본체시며 진리의 근원이신 그 하나님을 떠나 거리를 만드는 게 거짓의 본질적인 출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어떠한 차이나 분리나 거리도 없으시기 때문에 진리시며 거짓이 전혀 없으신 유일한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 밖으로 발가락 하나만 삐져 나와도 거짓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거짓 문제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당연히 거짓의 극복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이 책망의 이유이고 거짓의 핵심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히포의 주교는 실천적인 면에서 유용한 거짓의 8가지 분류법을 제공한다. 1) 종교적 가르침 속에서의 거짓, 2)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도움도 안되는 거짓, 3)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어떤 이에게는 도움을 주는 거짓, 4) 거짓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구사되는 거짓, 5) 감미로운 대화 속에서 타인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언급되는 거짓, 6)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떤 이에게는 일반적인 도움을 주는 거짓, 7)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떤 이에게는 영적인 도움을 주는 거짓, 8)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떤 사람을 육신적인 불결함에 빠지지 않게 하는 거짓 등이다. 환원주의 날이 훨씬 예리해진 오늘날은 더 다양한 종류의 거짓을 열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행위와 거짓과 성숙은 경계선이 대단히 애매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게 거짓의 원흉이란 사실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파생적인 것이고 개념의 옷을 입혔을 뿐이다. 그런데 파생적인 것도 중요하다. 그래도 이해의 질서는 필요하다. 이에 따라서, 거짓의 극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는 것이고 의식의 영역에 있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는 고의적인 거짓과 오류를 가능한 한 피하는 순차적인 처방이 필요한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즐거워 하여 주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은 상식이요 필수다. 성경의 물리적인 텍스트 가감, 해석학적 가감, 실천적인 가감을 경계하며 그러해야 하겠지만...

Controversia et Confessio

Controversia et Confessio (논쟁과 고백)는 마인쯔에 소재한 Academie der Wissenschaften und der Lieratur Mainz가 추진하는 16세기 개신교의 내부적 신학논쟁 자료 모음집 시리즈 이름이다. 각종 전집을 출간할 때에 편집자는 주로 어떤 주제에 대해 누가 무엇을 말했다는 접근법을 취하였다. 즉 한 인물이 어떤 주제들에 대해 말한 모든 것들을 수집하는 것인데, 교부와 칼빈과 루터의 전집이 그런 식으로 발행된 것들이다. 그러나 마인쯔가 기획하는 편집의 방식은 주제별 논쟁을 중심으로 관여한 모든 인물들 혹은 그룹들이 가진 입장들을 한 권에 담아내는 것이다.

 이미 옥스포드 출판사의 협조로 2008년에 Die Debatte um die Wittenberger Abendmahlslehre und Christologie 1570-1574, 2010년에는 Reactionen auf das Augsburger Interim: Der Interimistische Streit 1548/49가 나온 상태이고 앞으로도 2년 주기로 여섯권이 더 출간될 예정이다. 이런 기획의 장점이란 16세기 문헌들에 대한 접근력을 높인다는 건데 실제로는 편집된 조각과의 접촉이기 때문에 기대치에 부합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단 꼬장한 평가는 차치하고 이들의 특이한 발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학문적 관심이 동하시는 분들은 아래 사이트를 방문하면 되시겠다.

Controversia et Confess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