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9일 금요일

율법의 하한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의 보다 중요한 의미로서 정의와 자비와 신뢰를 버린 바리새인 및 서기관 무리들을 책망하는 문맥에서 예수님의 핵심 율법관이 제시된 대목이다. 예수님의 의도를 잘 간파한 바울의 말처럼 율법의 속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하라'나 '하지마라' 형식의 명령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도 아니고 우리가 이르러야 할 삶의 지고한 가치 상한선도 아니다. 응급조치 차원에서 잠시 있다가 소멸될 시한부 규범으로 제시된 것도 아니다. 최소한 이 이상은 내려가지 말라고, 더 내려가면 삶의 기반조차 와해될지 모를 덕과 행실의 항구적인 하한선을 그어준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일례로, 십계명의 도적질 금지는 타인의 소유물을 임의로 취하지 않으면 온전히 준수되는 계명이 아니다. 바울은 도적질 금지령의 적극적 의미가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궁핍이 생계의 존립마저 위협하면 도적질은 생존의 수단으로 채택되고, 이런 상태가 사회에 문화의 딱딱한 군살로 굳어지면 도적질은 급기야 적법의 지위까지 탈환하는 거북한 수순이 이어진다. 도적질 말라는 율법은 이처럼 내가 그런 행실을 범하지 않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절박한 가난과 결핍으로 대표되는 타인의 도적질 동기까지 제거하는 구제의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율법의 보다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세간의 기독교 평가가 심히 불쾌하고 괘씸한데 반박할 근거가 희박하다. '안그러는 사람이 더 많아'라는 대응은 여전히 궁색하다. 각종 비리와 탈법의 구린내가 교회의 회계장부 갈피마다 진동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윤리의 하한선 끝자락에 손가락 몇 개로 겨우 버티는 교회의 윤리실종 사태가 처처에 횡행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고개를 드실 수가 없도록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당하신다. 사회적 질서의 평균치만 들이대도 지위나 명예의 모가지가 달아날 부끄러운 짓들이 교회에는 은밀한 관행처럼 묵인되는 태도가 마치 건덕의 최선책인 양 용인되는 건 하나님의 징계가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의와 인과 신이라는 율법의 상한선을 당연히 추구해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라 말라'는 율법의 하한선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당당하냐? 그렇지가 않다. 율법의 정죄를 피하거나 버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여 각자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돌이킴이 우선이다. 그것이 저항과 개혁의 목소리가 된다면 주의 크신 은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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