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9일 수요일

바르트 한역 저술들

이상웅교수님의 글입니다.

1. 한글로 번역 소개된 칼 바르트의 저술

『그리스도인의 생활』,(서울:사상계사,1954)
『교회와 예배』,(서울:사상계사,1955)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서울:대한기독교서회,1956)
『로마서 소강해』,(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6)
『성서안의 새로운 세계』,복음주의신학총서1(서울:한국신학대학교,1964)
『은총의 선택/ 복음과 율법』,복음주의신학총서2(서울:한국신학대학교,1964)
『휴머니즘과 문화』,복음주의신학총서3(서울:한국신학대학교,1964)
『그리스도와 아담』,복음주의신학총서15(서울:한국신학대학교,1976)
『칼 바르트와의 대화』,(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7)-존 d. 갓세이 편집
『죽은자의 부활-고린도전서 15장 연구』,복음주의신학총서22(서울:한국신학대학교,1979)
『설교학 원강』,(서울:전망사,1981),=『칼 바르트의 설교학』,(서울:한들,1999)
존 d. 갓세이(편),『바르트 사상의 변화』,(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1)
『하나님, 교회, 예배』,(서울:기민사,1987)
『복음주의 신학 입문』,(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1989)
『의인과 성화』,복음주의신학총서33(서울:한국신학대학교,1990)
『공동체, 국가와 교회』,(서울:엠마오1992)
『말씀과 신학-칼 바르트 논문집i』,(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5)
『교의학 개요 / 사도신경 해설』,(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7)
『로마서강해』,(서울:한들,1997)
『자연신학』,(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1997)-브룬너의 "자연과 은혜"/바르트의 "아니오" 합본 『마지막 증언들』,(서울:한들,1997)
『주의 기도 /사도신조』,(서울:다산글방,2000)
『칼 바르트가 쓴 모차르트 이야기』,(서울:한들,199 )

2. 한글로 소개된 칼 바르트 관련 서적들

>g. c. 버카우어(조동진),『칼 빨트의 신학』,(서울:청문사,1962)-최근 재판/네덜란드에서는 1954년에, 영역본은 1956년에 간행되었으며, 칼 바르트는 본서에 대하여서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격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윤성범,『칼 바르트』,(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8)-바르트의 유일한 한국인 저자의 작품으로 스승 바르트에게 헌증한 이 작품은 스승이 죽기 불과 몇 달 전에 출간되었다.
>한국바르트학회,『바르트신학연구-바르트기념논문집』,(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0)-바르트 사후 바르트 추모 논문집으로 만든 것이다.
>오토 베버(김광식),『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6)
>칼 쿠피쉬(박종화),『칼 바르트』,(서울:한국신학연구소,1977)
>김영한,『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2)
>토마스 오든(이기춘),『바르트 신학과 로저스 심리학의 대화』,(서울:전망사,1983)
>김균진,『헤겔과 바르트』,(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3)
>박순경,『하나님 나라와 민족의 미래』,(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4), 27쪽-229쪽
>d. l. 뮬러(이형기),『칼 바르트의 신학사상』,(서울:양서각,1986)
>s. w. 사익스(이형기),『칼 바르트의 신학 방법론』,(서울:목양사,1986)
>백철현,『은총의선택-「교회 교의학」ii-2를 중심으로 한 칼 바르트의 선택론 연구』,(서울:기민사,1986)-저자가 한신대학교 th.m.논문으로 제출한 것
>에버하르트 윙엘(백철현),『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속에 있다』,(서울:기민사,1988)
>이신건,『칼 바르트의 교회론』,(서울:성광문화사,1989)-저자가 1987년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번역한 것=(서울:한들,2000)
>김애영,『칼 바르트 신학의 정치·사회적 해석-f. w. 마르쿠바르트를 중심으로-』,(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1)-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교에서 여성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의 이화여대 박사논문을 출판한 것이다. 지도교수는 박순경 교수였다.
>울리히 단네만(이신건),『칼 바르트의 정치신학』,(서울:한국신학연구소,1991)
>박봉랑,『신학의 해방』,(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1)-본 서 속에는 저자가 1958년에 하바드 대학교에 제출했던 학위논문이 번역 수록되어 있고, 바르트에 대한 소개글도 실려 있다.
>조르쥬 까잘리(최영),『칼 바르트의 생애와 사상』,(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3)
>제프리 브로밀리(신옥수),『칼 바르트 신학 개론』,(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1994)
>t. f. 토랜스(최영),『칼 바르트-성서적 복음주의적인 신학자』,(서울:한들,1997) >전성용,『칼 바르트의 성령론적 세례론』,(서울:한들,1999)
>c. 밴틸(김해연),『신현대주의』,(서울:성광문화사,199 )
>김재진,『칼 바르트 신학의 해부』,(서울:한들,199 )
>한종희,『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2002)


하나님의 은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15:10)

'무엇을 하면 무엇을 주겠다'는 율법의 인과적 표현에 홀려 성화를 우리가 흘린 땅방울의 정당한 보상으로 보는 이해가 유령처럼 여기저기 부유한다. 이는 복음은 주어진 은혜지만 율법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의 기준에 근거하여 결과가 뒤따르는 것처럼 이해하는 우리의 말초적인 안목에 충실하면 누구나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판단의 균형추를 양도하는 유력한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의 차이가 본질적인 것(ad substantiam)에 있지 아니하고 형식적인 것(ad formam)에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구약이 스스로 밝히는 율법의 핵심은 그게 '복'의 길(modus)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은 폭압적 주먹의 제도적 둔갑이란 오늘날의 법이해와 질적 궤를 달리한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복이 주어지는 방식이란 점에서 믿음의 선배들은 법을 복음 (substantia)의 한 형식(forma)으로 이해했다. 이런 전통적인 이해의 궤도를 이탈할 순 없지만,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가 임하는 갈림길의 목덜미를 행위의 가시적 주체인 내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선뜻 찬동의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 안다.

하긴 최고의 신학자요 저술가인 바울도 스스로를 다른 제자들의 사도적 족적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수고와 고생의 주체로 혈기까지 부리면서 내세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숙한 됨됨이의 궁극적인 출처를 공로와 댓가라는 인간적인 냄새 물씬 풍기는 얄팍한 인과율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외마디로 해명의 변을 종결했다. 빛의 번역에 불과한 시공간의 인과율적 해석은 만물과 역사의 근원을 푸는 열쇠가 아니다. 인류의 지성사에 지식의 등뼈로 여겨지는 인과율의 이런 상대화는 분명 지성인의 심기를 거북하게 건드리는 것이겠다. 그러나 만물이 비롯되고 말미암고 돌아가는 하나님 자신이 배제된 모든 해석은 아무리 지적 인과율의 촘촘한 그물망을 투과했다 할지라도 거짓이다.

그 해석이 윤택하고 합리적인 것일수록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에 보다 은밀하고 위험한 거짓이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이해의 기본적인 틀을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을 인과율 형태로 제시된 복의 정도(程度)로, 복음의 형식으로 간주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때때로 경건의 가식적인 표제어로 해프게 오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실상 인간의 본성적인 자랑과 교만을 제거하는 가장 예리한 메쓰다.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순종이 우리를 위한 율법의 마침이란 사실 앞에서 자랑의 가증한 고개를 들고 교만의 뻗뻗한 목을 세울 자가 누구인가!

즉각적인 구원에 있어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지속적인 성화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마침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우리됨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는 해석이 아니라 해석학적 도피를 불허하는 진실이다.

2013년 1월 8일 화요일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6:11)

기도는 존재의 확인이며 그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성도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경계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예수님의 기도 가르침은 서로 충돌되는 개념이 아니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추구된 이기적 유익이고 후자는 인간의 코람데오 존재성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요청이요 초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뭔가를 구하거나 의존하지 않아도 될 필요성 부재의 완전한 독립성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적이 없으시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언명의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 편에서의 의미만 더듬어도 거부할 수 없는 진리임이 확인된다.

인간은 신 의존적인 존재이다. 창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경되지 않을 존재의 항구적인 현주소다. '항상 기도하라' 명하신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의 그런 의존성을 존재 차원에서 인정하고 결국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을 기념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진정한 실상을 깨우치기 위해 주어졌다. 기도의 개념이 물질적인 차원의 청구와 수령에만 머물면 만 번의 기도응답 위용을 떨친 기도의 달인들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밖에 없어진다. 기도응답 수효가 적으면 천국의 이등급 시민인 양 위축되는 현상도 때때로 수반된다. 이건 큰 속임수다. 기도의 본질을 가리고 기도의 지엽적인 의미 조각에 매달리게 하려는 사단의 계략 말이다.

굶어본 사람은 일용할 먹거리의 절박함을 안다. 내게도 골수에 박힌 지식이다. 그렇다고 그런 절박성이 기도의 본질을 장악하게 놔두는 건 경험론에 기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짓이다. 물론 '먹거리'란 말보다 생의 살갗이 극도로 떨리게 하는 자극적인 언어는 없다. 그러나 '양식'은 위장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존재와 인생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하루하루 존재하며 기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바람직한 항복과 인정이 기도다. 동시에 인생의 마지막 양식으로 산소를 먹고 있는 이상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중단되지 않고 있음을 인정하는 의지적인 찬양과 고백이 또한 기도다.

기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적인 질서 밖에서의 신적 개입을 촉구하는 독촉장 정도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는 기도는 우리의 성정에 너무도 가까워서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상의 질서와 인과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은총을 따라 주어진 선물이란 사실을 항상 고백하며 존재의 뼈다귀에 새기라는 기도의 외투를 걸친 명령이다. 그래서 예전에 신학을 가르쳐 준 선생님은 이 기도를 통하여 '일상이 하나님의 항구적인 기적'임을 배운다고 하시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도의 열정이 싸늘하게 식는 분들을 가끔 만난다. 오해 때문이다.

예기치 않게 떨어진 발등의 불을 끄는 소화기 기능이 기도에 왜 없겠는가! 그러나 불시에 닥친 환란은 인내와 소망의 전령인 경우가 허다하다. 당장 시급한 불을 끄다가 주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것을 유레카한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응급처방 차원에서 허락하신 삶의 굴곡이 기도의 본질을 주형하는 건 아니기에 또 다시 강조한다. 기도는 항상 쉬지 말고 하는 것이며 당연히 바로 지금의 일상 및 존재와 결부되어 있다. 칼빈은 기도를 은총의 수단이라 했다. 맞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신 의존적인 정체성을 확인하고 일상이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항구적인 기적이란 진실을 무시로 확인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이벤트가 아니라 호흡처럼 항상 쉬지 않아야 하는 거의 존재에 가까운 개념으로 규정된다. 하여 기도는 존재의 확인이며 본연의 질서에 머무는 은총의 수단인 것이다.

2013년 1월 7일 월요일

신학공부 기본기

신학공부 기본기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신학적 논적 제거하는 것을 겨냥하면 상대방이 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영혼이 먼저 패망한다. 주께서 우리로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지식의 정상은 그의 속성인데 신학적 삼천포로 빠져서다. 진정한 목표의 어중간한 중턱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안주의 돗자리를 까는 건 곤란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과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을 지향한다. 그런 신적 속성을 지향하는 게 모든 성도들의 기본기요 신학생의 기본기다. 

신학은 칭의와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여정의 학문적인 작업이다. 신학책을 읽거나 논문을 쓰거나 논문을 발표할 때에도 신적 속성이란 지향점을 망각하고 경시하면 신학이 신학자를 무시하고 비웃는 때가 머잖아 도래한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는 바울의 경고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쌈박질 신학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며 다투지 아니하고 온유함과 인내로 진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문맥에서 주어졌다.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 속성에 참여하고 그 속성이 증거되는 것과 무관한 것들은 대체로 사단의 유혹이다.

각 사람의 신학적 입장은 그것이 그 사람의 평생에 일구어온 인격과 삶의 대표성이 될 때에 비로소 개혁주의, 루터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등의 뱃지를 적법하게 착용하는 거다. 각자의 신학적 입장이 입술로도 확인될 수 있겠으나 그 자체가 주관성이 퍼뜨리는 파장일 뿐이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베드로와 바울이 동일한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성에의 참여를 지향하지 않는 중턱이 정상처럼 과장된 모든 신학을 거절하는 태도가 우리 자신에게 발견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성경에 가장 가까우면 그게 권위이다.

입술의 경박한 논쟁보다 인격과 삶의 진중한 설복이 훨씬 덕스럽고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지향점을 정직하게 표명하기 위해 '개혁주의' '루터주의' '복음주의' 등의 수식어를 사용하는 걸 나무랄 필요는 없는 듯하다. 그런 사람인 줄 이해하면 된다. 오히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거짓으로 위장하고 고의적 헛갈림을 조장하는 분들의 속이 더 시커멓다. 물론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등으로 갈라진 초대교회 계파문화 문제점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어서다.

그냥 성경과의 밀착 여부로 진리의 진정성이 좌우되는 게 최상의 문화다. 그러니 계파를 밝히는 것도 엄밀하게 보면 우스운 일이겠다. 다만 상황의 특수성에 기인한 입장표명 정도는 허용되면 좋겠다.

2013년 1월 5일 토요일

마음이 정결한 자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도 소원했던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visio Dei)이다. 이레니우스 [이단론]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빛을 관조하는 자들이 빛 안에 거하고 그 광채에 취하듯이 하나님을 보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분의 광휘에 휘감긴다. 그 광휘가 생기를 더하기에 그들은 생명을 소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파악이 불가하고 제한이 없으며 가시권 밖이지만 자신을 낮추셔서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머리의 한계 내에서 보이시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었고 그런 방식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바라보는 이들에게 생기를 더하신다. 그의 위엄은 파악을 넘어서며, 그의 선하심은 표현할 수 없도다. 그러나 위엄과 선하심을 통해 보이시는 하나님은 그를 보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도다. 생명을 떠나는 살 수 없고 생명의 수단은 주님과의 교제에 있도다. 주님과의 교제는 그를 아는 것이며 그의 선하심을 즐기는 것이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