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9일 수요일

하나님의 은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15:10)

'무엇을 하면 무엇을 주겠다'는 율법의 인과적 표현에 홀려 성화를 우리가 흘린 땅방울의 정당한 보상으로 보는 이해가 유령처럼 여기저기 부유한다. 이는 복음은 주어진 은혜지만 율법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의 기준에 근거하여 결과가 뒤따르는 것처럼 이해하는 우리의 말초적인 안목에 충실하면 누구나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판단의 균형추를 양도하는 유력한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의 차이가 본질적인 것(ad substantiam)에 있지 아니하고 형식적인 것(ad formam)에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구약이 스스로 밝히는 율법의 핵심은 그게 '복'의 길(modus)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은 폭압적 주먹의 제도적 둔갑이란 오늘날의 법이해와 질적 궤를 달리한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복이 주어지는 방식이란 점에서 믿음의 선배들은 법을 복음 (substantia)의 한 형식(forma)으로 이해했다. 이런 전통적인 이해의 궤도를 이탈할 순 없지만,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가 임하는 갈림길의 목덜미를 행위의 가시적 주체인 내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선뜻 찬동의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 안다.

하긴 최고의 신학자요 저술가인 바울도 스스로를 다른 제자들의 사도적 족적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수고와 고생의 주체로 혈기까지 부리면서 내세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숙한 됨됨이의 궁극적인 출처를 공로와 댓가라는 인간적인 냄새 물씬 풍기는 얄팍한 인과율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외마디로 해명의 변을 종결했다. 빛의 번역에 불과한 시공간의 인과율적 해석은 만물과 역사의 근원을 푸는 열쇠가 아니다. 인류의 지성사에 지식의 등뼈로 여겨지는 인과율의 이런 상대화는 분명 지성인의 심기를 거북하게 건드리는 것이겠다. 그러나 만물이 비롯되고 말미암고 돌아가는 하나님 자신이 배제된 모든 해석은 아무리 지적 인과율의 촘촘한 그물망을 투과했다 할지라도 거짓이다.

그 해석이 윤택하고 합리적인 것일수록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에 보다 은밀하고 위험한 거짓이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이해의 기본적인 틀을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을 인과율 형태로 제시된 복의 정도(程度)로, 복음의 형식으로 간주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때때로 경건의 가식적인 표제어로 해프게 오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실상 인간의 본성적인 자랑과 교만을 제거하는 가장 예리한 메쓰다.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순종이 우리를 위한 율법의 마침이란 사실 앞에서 자랑의 가증한 고개를 들고 교만의 뻗뻗한 목을 세울 자가 누구인가!

즉각적인 구원에 있어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지속적인 성화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마침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우리됨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는 해석이 아니라 해석학적 도피를 불허하는 진실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