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8일 화요일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6:11)

기도는 존재의 확인이며 그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성도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경계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예수님의 기도 가르침은 서로 충돌되는 개념이 아니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추구된 이기적 유익이고 후자는 인간의 코람데오 존재성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요청이요 초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뭔가를 구하거나 의존하지 않아도 될 필요성 부재의 완전한 독립성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적이 없으시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언명의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 편에서의 의미만 더듬어도 거부할 수 없는 진리임이 확인된다.

인간은 신 의존적인 존재이다. 창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경되지 않을 존재의 항구적인 현주소다. '항상 기도하라' 명하신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의 그런 의존성을 존재 차원에서 인정하고 결국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을 기념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진정한 실상을 깨우치기 위해 주어졌다. 기도의 개념이 물질적인 차원의 청구와 수령에만 머물면 만 번의 기도응답 위용을 떨친 기도의 달인들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밖에 없어진다. 기도응답 수효가 적으면 천국의 이등급 시민인 양 위축되는 현상도 때때로 수반된다. 이건 큰 속임수다. 기도의 본질을 가리고 기도의 지엽적인 의미 조각에 매달리게 하려는 사단의 계략 말이다.

굶어본 사람은 일용할 먹거리의 절박함을 안다. 내게도 골수에 박힌 지식이다. 그렇다고 그런 절박성이 기도의 본질을 장악하게 놔두는 건 경험론에 기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짓이다. 물론 '먹거리'란 말보다 생의 살갗이 극도로 떨리게 하는 자극적인 언어는 없다. 그러나 '양식'은 위장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존재와 인생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하루하루 존재하며 기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바람직한 항복과 인정이 기도다. 동시에 인생의 마지막 양식으로 산소를 먹고 있는 이상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중단되지 않고 있음을 인정하는 의지적인 찬양과 고백이 또한 기도다.

기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적인 질서 밖에서의 신적 개입을 촉구하는 독촉장 정도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는 기도는 우리의 성정에 너무도 가까워서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상의 질서와 인과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은총을 따라 주어진 선물이란 사실을 항상 고백하며 존재의 뼈다귀에 새기라는 기도의 외투를 걸친 명령이다. 그래서 예전에 신학을 가르쳐 준 선생님은 이 기도를 통하여 '일상이 하나님의 항구적인 기적'임을 배운다고 하시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도의 열정이 싸늘하게 식는 분들을 가끔 만난다. 오해 때문이다.

예기치 않게 떨어진 발등의 불을 끄는 소화기 기능이 기도에 왜 없겠는가! 그러나 불시에 닥친 환란은 인내와 소망의 전령인 경우가 허다하다. 당장 시급한 불을 끄다가 주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것을 유레카한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응급처방 차원에서 허락하신 삶의 굴곡이 기도의 본질을 주형하는 건 아니기에 또 다시 강조한다. 기도는 항상 쉬지 말고 하는 것이며 당연히 바로 지금의 일상 및 존재와 결부되어 있다. 칼빈은 기도를 은총의 수단이라 했다. 맞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신 의존적인 정체성을 확인하고 일상이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항구적인 기적이란 진실을 무시로 확인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이벤트가 아니라 호흡처럼 항상 쉬지 않아야 하는 거의 존재에 가까운 개념으로 규정된다. 하여 기도는 존재의 확인이며 본연의 질서에 머무는 은총의 수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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