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6일 일요일

죄의 자유, 의의 노예

"나는 사람의 예를 따라서 말한다"(Ἀνθρώπινον λέγω). 이는 바울이 사람들의 연약함 때문에 취한 어법이다. 자유와 노예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그런 어법의 일환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당시 "자유"와 "노예"라는 용어의 문맥적 의미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런 노력은 해석학적 작업의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 텍스트의 해석이 이르러야 할 종점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예를 따라" 한 말이라는 바울의 고백에서 찾아진다. 즉 이해의 용이성을 위해 사람의 예를 따랐을 뿐이지 거기에서 해석학적 안식을 가지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사람의 예는 도구이다.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나를 얽어매던 것에서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것에 대한 종됨의 준비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사망에 이르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되었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이는 노예사회 속에서의 종과 자유 개념이 다 포섭하지 못하는 내용이다.

바울이 지금 사람의 예대로 설명하는 내용은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문맥에서 주어졌다. 즉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거룩, 그 거룩에 이르는 의, 그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기에, 결코 사망에 이르는 불경, 그 불경으로 질주하는 불의, 그 불의에 이르는 불순종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사람의 예대로 해명하고 있다.

누구에게 순종하든 순종하는 것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원칙이다. 즉 인간은 본질상 무엇에의 노예이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노예이고 의에 순종하면 의의 노예이다. 그런데 죄에서의 해방을 방종에의 준비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죄에서의 자유와 의에로의 노예 사이에는 개념적 비무장 지대가 없다. 방종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죄의 자유는 의의 노예이고, 의의 자유는 죄의 노예이다. 기독교는 이것을 가르친다.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방종의 면죄부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에겐 순종만 있고 무엇에 대한 노예의 신분만 가능하다. 비통해 할 거 없다. 자유라는 것은 순종의 대상에 의해 좌우된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의에 대하여 노예가 될 때에 주어진다.

교회에서 의를 찾아보기 어렵다면 그건 방종의 간교한 올무에 걸려든 결과이다. 어쩌면 죄에서의 자유가 의에로의 종됨이란 사실의 자발적인 망각에서 저질러진 자작극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그건 아니기를 바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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