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0일 일요일

부활의 역사성

도둑질 하여 갔다고 하여라 (마28:13)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부활은 그 시대의 그들에게 아니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정보로는 전두엽의 한 귀퉁이에 보관해 둘 수는 있어도 전인격 속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개념이다. 두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체의 악취가 진동하는 무덤으로 슬픈 걸음을 옮겼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큰 지진을 맞아 땅과 몸과 의식의 두렵고 유쾌한 진동에 휩싸였다.

그녀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신속한 재보를 위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재보의 달음질 도중에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면서 두려워는 말라고 타일렀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큰 기쁨"만을 가지고 제자들을 향해 걸음을 이어갔다.

같은 시각에 이러한 부활의 실재적인 상황을 접수한 경비병 중 몇 사람은 직속 상관에게 알리지 않고 대제사장 무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를 재보했다. 말씀대로 늘 행하셨던 예수님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짐작에 근심의 목덜미가 잡힌 종교계가 사전에 경비병의 일부를 매수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종교계의 주류는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의 헐거운 지갑에 거액을 찔러 주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그의 제자들이 야밤에 "도둑질해 갔다"는 위조된 정보를 흘리라고 명하였다. 혹 이 일이 총독에게 알려져도 뒷탈이 없을 것이라며 안심시켜 주기까지 했다. 이건 종교계 인사들의 수상한 범정치적 오지랍 사이즈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정치권과 교계의 주류가 취한 반응은 부활을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삶과 신앙에서 고립과 탄압과 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언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봉쇄되고 제자들은 시체 도적질을 일삼고 거짓을 살포하는 비도덕적 처신의 주범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할 목격자인 여인들의 증언은 당시 법적인 효력을 가졌을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지금까지 부활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간에게 가용한 모든 권모와 술수를 동원해도 부활의 역사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는 증거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응하는 당시 종교계의 유치한 작태는 고작 손바닥 몇 개를 동원해 하늘을 덮겠다는 시도였다. 하늘의 땅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역사를 안개와 같이 사라질 인생이 뒤틀고 덮으려는 시도 자체가 경악할 오만이요 무지요 패악이다.

부활은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선포한다.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증거한다. 죄에 대한 고발 및 참소에 대한 공의와 자비의 승리를 확증한다. 인간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성공을 공포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크고 놀랍고 기쁜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계는 이것을 사람의 비열한 도모로 남루한 금품살포 비책으로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나귀도 웃을 일이고 돌들도 증언의 입술을 벌릴 일이겠다.

진리는 사람이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사람이 탁 트인 무대에 올린다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전달은 기적이고 은혜이다. 오늘날 부활의 명확한 역사성이 숨쉬고 있다면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숨결로 간주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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