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8일 월요일

진리를 찾아서

인생은 진리가 표출되는 계기들로 충만하다. 슬플 때에도, 기쁠 때에도, 외로울 때에도, 억울할 때에도, 이별할 때에도, 사랑할 때에도, 놀랄 때에도, 감동할 때에도, 아플 때에도, 바쁠 때에도, 나른할 때에도, 서러울 때에도, 한가할 때에도, 끔찍할 때에도 진리의 조각은 언제든지 표출된다. 다만 포착은 각자의 몫이겠다.

삶의 무수한 순간들이 다양한 각도로 최소한 진리의 한 부분은 조명한다. 진리가 포착되지 않은 순간보다 더 허무하고 무의미한 경우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진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최고로 황활한 순간도 곧장 허무로 돌변한다. 이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전도자의 탄식과도 상통한다.

진리가 늘 목마르다.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순간마다 모든 사건과 사태와 사물을 접하면서 갈증의 촉수는 늘 진리를 더듬고 싶어진다. 진리와 접지하는 순간 영혼에 자유가 번진다. 진리는 과연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다. 수갑이나 족쇄만이 아니라 영혼의 결박까지 제거한다. 주님은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자유의 손을 뻗으시나 보다.

하루를 살아가며 매 순간마다 진리와의 만남이 없다면 겉으로는 자유하나 속으로는 무언가에 얽매여서 갇힌 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도가 명시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부르심에 방향이 있다. 부르심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이미 설정된 목적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다.

자유는 우리의 학구적인 땀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면벽수행 결과물로 혹은 무소유의 보상으로 여기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그런 고행이나 수도로 자유에 대한 말초신경 수준의 표피적인 개념은 경험할 수 있겠으나 자유의 본질은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위험하다. 자유에 대한 어설픈 경험이 참자유에 대한 갈증마저 훼손하기 때문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사도의 증언에서 자유가 주님 의존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주님과 독립된 자유는 없으며 그런 자유의 누림도 없다. 이는 아들이 자유하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유하지 못해서다. 진리는 진리의 영에 의해서만 경험한다.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 진리의 영이신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 자유이다.

숨통이 콱콱 막히는 부자유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몸부림의 역사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당연한 현상이다. 썩어짐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고자 내뱉는 신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그 슬픈 음파의 강도가 고조되는 느낌이다. 교회가 진리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으면 절망은 필연이다.

그래서 오늘도 모든 희로애락 속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된 진리의 한 조각을 찾기 위해 하루치의 모든 에너지와 지력과 관심과 초점을 투입하려 한다. 오늘따라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사태의 긴박성을 더욱 부추긴다. 진리를 찾아서...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신음하는 피조물의 웃음을 찾아서...하루하루 매 순간마다...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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