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8일 화요일

고통을 생각한다

사전은 고통을 육신과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라 한다. 요즈음 보다 근원적인 고통으로 '스트레스'가 일순위로 언급된다. 다양한 파생적 고통을 조장하는 정신적인 고통의 비중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보다 심각하고 끔찍한 고통이 여호와를 버린 것, 그를 경외함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고통은 때때로 무엇은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다. 아프면 생각도 행위도 중단한다. 아파야 무엇이 문제인지 감지한다. 고통은 피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래서 고통은 제어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고통에 대한 반응의 순발력은 빛의 속도를 방불한다. 상황이 그런 속도를 요구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고통 감지력이 없으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몸의 고통은 신경이 감지한다. 그런데 영혼의 고통은 감지의 기관이 모호하다. 여기에서 죄의 삯이 사망이란 사실이 중요하다. 영혼의 고통 감지력은 죽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이 고통인지 모르고 고통이 있어도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어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단적인 죄와 심각성을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적한다. 여기서 악과 고통은 분리되어 있지가 않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근본적인 고통이다. 다른 건 파생적인 고통이다.

만약 여호와를 경외함이 고통인 줄 모른다면 심각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개인이든 교회든 국가이든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으면 극도의 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며 극도의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지하지 못하면 불경건 행보는 제어되지 않고 중단되지 않는다. 지금 여호와 경외의 여부도 모른다면 그건 위태로운 중증이다.

고통 감지력의 회복이 시급하다. 내 속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있는지를 꼼꼼하게 살펴야 하겠다. 훅 불면 날리우는 죄악된 존재의 가벼움을 직시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겠다. 오만의 뾰족한 고개를 숙이고 겸손의 둥근 허리를 굽혀야 하겠다. 영적 고통을 감지하는 신경의 회복을 오늘은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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