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3일 수요일

주어이신 그리스도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요4:10)

신앙과 신학은 성경의 주어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고 끝맺는다. 이 물음을 놓치면 신앙은 흔들리고 신학은 무너진다. 사탄이 줄기차게 소환하는 세상의 온갖 선악과 시험은 이 물음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목적을 지향한다. 최소한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인류의 첫 조상이 따막은 사건은 금지령의 주어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과 맞장을 뜬 범죄이다. 법조문의 위반이나 판단의 미숙이나 행위의 경박이나 좀도둑질 차원이 아니라 명령의 주어와 관계되어 있다.

구약의 일등급 신학자라 할 욥에게 쏟어진 하나님의 무수하고 까칠한 질문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누구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종국적인 반응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냐는 자기 정체성에 관해 자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관심사도 '너희는 나를 누구냐'에 있으셨다.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가 묻고 듣고자 하신 물음의 핵심도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냐에 대한 것이었다.

여인의 궁극적인 문제는 일평생 골머리를 앓은 6명의 남편들에 관한 것도, 그녀의 껄끄러운 직업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가 누구신 줄 알았다면 그녀는 생의 근본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 하는 이가 오시면 모든 것들에 대해 알려주실 것인데 그가 계시하실 내용의 본질은 예배의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예배의 처소는 영과 진리이다. 그 처소로 나아가는 길은 메시야 자신이다. 동시에 진리시기 때문에 예배의 처소도 되신다.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영원한 생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모른다면 누구도 결코 목마르지 않을 영생수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어가 중요하다.

어떠한 분야에 탁월하면 칭찬과 존경이 쏟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신학이든 신앙이든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가지 않고 어정쩡한 지점에서 인간적인 칭찬과 존경의 촉수에 찔려 감염되는 순간 웃고 즐기다가 그리스도 예수를 놓치는 총체적인 상실에 직면한다.

오늘은 왠지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 온 느낌이다. 예수님의 질문을 곰곰히 곱씹으며 모든 사안에서 모든 순간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인생과 신앙과 신학의 주어이길 묵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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