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4일 월요일

사랑과 지식과 분별

나는 이것을 기도한다: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에 있어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1:9)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개인적인 바램이 아니다. 주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얻도록 구하라고 본보이신 기도의 모델이다. 바울의 짤막한 기도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의 선명한 방향과 지침을 제공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사도의 기도를 뜯어보자.

바울은 자신의 기도에서 사랑은 몽롱한 감정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지식 및 온전한 분별력의 지속적인 증대와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당연히 뜨거운 가슴을 사랑의 전부로 여겨서는 안되겠다. 계속해서 자라나야 하는데 지식과 분별이 온전해질 때까지 자라나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사랑은 바른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지식을 요청한다.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다소 모순적인 순환적 어법이 그런 사랑과 지식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된다. 알면 알수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알수록 우리는 무엇이 유용한 것인지를 분별하고 인정하게 된다. 주님을 모르면 대체로 썩어 없어지는 것들에 짐승의 본능 수준으로 집착하게 된다.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보다 찰나적인 사물과 상태가 더 유용하게 보이기에 그것을 얻으려고 이성이 없는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든다. 그런 판단력을 따라 살아간다.

이는 올바른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않은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진정한 사랑과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돌이키려 하지도 아니한다. 주변에서 진실하게 조언해도 구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마치 지식이 없는 소원의 광기처럼 지식이 없는 사랑의 맹목성도 제어할 수단이 없어 보인다.

사랑에도 격이 있다. 깊고 높고 길고 넓은 차원이 있다. 온전하지 않은 상태의 사랑을 전부로 여기거나 사랑의 최종적인 상태나 정점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온전한 사랑의 훼방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어설픈 철부지 사랑은 로맨틱한 추억용 사랑일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지향하고 고집해서 머물러야 할 사랑의 종착지는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분별에서 자라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자람의 정도는 무한대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야 하는 게 사랑이다. 지성과 방향과 재능과 가치를 다 걸어야 한다. 이는 수단일 수 없고 방편일 수 없고 지나가는 과정일 수 없는 게 하나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면이 아니라 포괄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그런 개념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가 가르치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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