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5일 화요일

기독교적 지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빌1:10)

칼빈은 무엇이 유용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기독교적 지혜의 정의라고 말한다. 이 지혜는 공허한 교설과 사변으로 정신을 고문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무익한 것을 배우며 시간과 정신을 허비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당시 소르본 대학의 학자들이 일생을 탕진하며 매달렸던 주제들은 영적인 유익과 천상적인 삶의 윤택을 도모함에 있어서 심지어 유클리드 기학학의 논증보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고 칼빈은 비판한다.

사단은 성도의 소명에 거치는 돌맹이 두기에 능숙하다. 실족하게 만들고, 걸려 넘어지게 하고, 삼천포로 빠지게 하는 궤변 구사력에 있어서 사단을 능가하는 존재는 없다. 유용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단의 꾀임에 빠지는 분들이 적지가 아니하다. 대체로 학자들이 그런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학문'이란 명패만 사용하면 교회의 유익과 무관한 것들에 매달리고 논해도 괜찮다는 관념에 타협의 손을 쉽게 내뻗는다.

이런 우매함은 전염성도 유난히 강하다. 학문을 논하는 놀이터의 담벼락을 넘어 교회와 선교의 현장까지 비본질적 잡설과 잡무에 집착하게 만들어 시시비비 올무에 꿰고 쥐락펴락 한다. 이는 대체로 내가 살아 있어서 걸려드는 함정이다. 별거 아닌 일들 때문에 곳곳에서 충돌하고 핏대를 올리고 찢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으로 쉬 덮어질 허물들에 노골적인 조명등을 비추며 그것들을 동네방네 공공연히 퍼뜨린다. 그러면 그 사안에 대해 편이 깔끔하게 갈라진다. 갈라진 두 편 사이에는 싸늘한 신학적 전선이 형성되고 평화의 교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무언의 룰을 깨뜨리는 자는 희생양이 되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강도 높은 징계의 본보기로 채택된다.

그러나 기독교적 지혜는 사랑으로 덮어질 사안에 대해서는 덮고 지나간다. 거기에 시간과 마음과 관심사를 과용하지 않는다. 교회에 진실로 유용한 것들을 식별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가 그것이다. 그 열매의 풍성한 결실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일에 가용한 모든 재원들을 동원하여 주목하고 매달린다.

공부를 하든 목회를 하든 사업을 하든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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