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8일 월요일

기독교적 삶의 원리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전5:15)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상식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교회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기독교는 이러한 인생관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기독교의 향기는 악취로 변하고 빛은 어둠으로 대체되고 소금의 맛도 상실하여 버림의 길바닥에 나딩구는 돌맹이 신세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의 의미와 우리 편에서의 함의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우리 편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 우리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면 자신을 위하는 삶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그러나 주님에 대하여는 살고자 하면 살고 죽고자 하면 죽는다. 이는 그렇게 살아도 그만 안살아도 그만인 개념이 아니다. 그렇게 살면 복이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불행이다. 기독교적 인생관이 이렇다. 그런데 이러한 삶과 죽음의 원리가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모든 사람에게 복이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양심에도 저촉되는 일이겠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사는 삶은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가장 영광스런 유형이다. 손해보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 할 필요도 없다. 이는 그리스도 위하는 삶이 우리에게 최고의 은총이요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으로 초청을 받았다는 것이 여전히 껄끄러운 사람들은 소돔의 관능적인 삶과 애굽의 어설픈 풍요에 아직도 미련을 두는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보이는 안목과 싸우셔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다는 것은 그분처럼 산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살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 나의 삶에서 향기로 풍기고 빛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삶으로 주님을 보여주는 증인이 교회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안식처를 찾아 교회에 출입하는 자들을 등치고 등의 가죽까지 벗겨 먹으려고 혈안이 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교회에 유익을 끼칠만한 자에게만 끈적한 미소를 보내지는 않는지를 말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여야 한다. 그런 삶의 방향이 포기된 교회의 미래는 암담하다. 불행을 자초한다.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는 게 최고의 영광이요 복이라는 기독교적 삶의 역설적인 원리를 포기하면 포기하는 만큼 불행이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하고 있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나와 교회를 위한 교회는 필히 불행으로 곤두박질 친다. 그게 원리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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