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7일 금요일

인류의 책임전가 행습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2)

팩트가 맞습니다. 그러나 팩트를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인데도 죄의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물음에 답하는 아담의 진술은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다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돕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금령을 어긴 아담의 처신은 "책임전가" 신공을 구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담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오고오는 수천년의 장구한 세대들이 일관되게 답습해 오고 있습니다. 이 신공은 책임의 소재가 추궁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동원되고 있는 듯합니다. 책임을 전가할 마땅한 대상이 눈에 걸리지 않을 경우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망각을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사례들이 메스컴의 요충지를 두루두루 뒤덮고 있습니다.

역사의 길이만큼 오래된 책임전가 문화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국가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급속히 퍼지는 역병처럼 번져 있습니다.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서질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언제나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가장 단순하고 본질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금령이 직접 주어진 대상은 아담이며 하와도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을 보면 아담이 자신의 아내에게 이 금령에 대해 주의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터졌다면 아담의 전달력에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하와가 너무도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한 과실에 욕심이 생겨 죄를 잉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 의존적인 사색을 한다면 문제의 책임을 아담에게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아담이 팩트를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찾아와 심문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증인의 입술에서 팩트가 진술될 때에 비로소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분이 아닙니다.

다 아시지만 인류의 대표성을 띠는 아담에게 먼저 물으신 것은 사실을 말하라는 의도를 가지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담의 옹졸하고 면피적인 처신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처신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었고 교회가 저지른 일이라며 정확한 팩트를 직고하여 죄책을 면하고자 하였던 첫번째 아담의 처신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도록 당신은 죽으신 분입니다.

아담의 처신이 이랬어야 했습니다. 하와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한한 사랑과 무궁한 긍휼을 신뢰하며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혹 회개한 이후에 사망의 삯을 지불하게 되더라도 그런 태도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했던 아담, 마치 오늘날 우리의 실상을 벌거벗은 것처럼 비추는 듯합니다.

전 인류와 온 역사의 실상과 수치가 아담의 비겁한 처신에 다 압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에 우리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의 근성을 훌러덩 벗고 자기가 짓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마치 내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주 앞에 엎드려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여 십자가의 의를 전가하신 두번째 아담의 처신으로 살아가야 할 듯합니다.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것 자체가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군림해 온 책임전가 행습에 종지부를 찍는 효력을 낳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실천해 보십시오. 인류의 무너진 관계성의 첫번째 원인이 말끔하게 제거될 것입니다. 동시에 두번째 아담의 영광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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