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7일 화요일

사랑의 증인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되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롬5:8)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이유에 대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우리에게 익숙하고 선호되는 그런 삶으로는 진정한 사랑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이스라엘 역사는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으로 증명된 하나님의 짝사랑이 연출된 극장이다. 온 세상과 열방의 역사도 그런 사랑의 현장이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했다. 몇 가지의 잘못된 행실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죄는 바울의 지적처럼 본성의 부패 때문에 본질상의 문제였다. 그런데도 싹슬이 진멸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냥 없던 것으로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는 무언가가 희생으로 지불된 어떤 은혜와 사랑의 결과였다.

그러니 자연을 보나 인류의 역사를 보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나 나아가 오늘의 나 자신을 보나 지금의 교회를 보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증명은 단절되지 아니했다. 죄인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세상의 어설픈 저울로는 도무지 측량을 불허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사랑 입증의 증인이다. 그런 사랑의 입증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사랑할 자격이나 근거나 상태에 있지 아니한 죄인들, 그런 원수들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르심 말이다. 그런 부르심에 충실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다. 친분이 있고 아껴줄 근거의 소유자만 골라서 그의 탐욕스런 배를 불리고 불의를 편들고 편협을 두둔하는 그런 방식으로 산다면 복음의 정수를 훼손하는 인생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가까운 내 주변만이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 자신과 가족과 기업과 국가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한 증인의 삶이 요청된다. 그런데 교회의 모습과 나의 꼬라지는 그런 증인의 삶과 심히 동떨어져 있음을 목도한다. 마치 의로운 재판장인 양 외부의 어떤 원인을 발굴해서 적당한 희생양을 만들고 책임을 전가하는 꼬라지 말이다.

각 사람이 모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경주하지 않으면 아무리 모든 사람의 감탄과 동의와 갈채를 확보한 최적의 희생양이 찾았다고 할지라도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실패의 심연만 깊어지게 한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상의 해답을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목청이 터져라고 외쳐왔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모든 시대와 상황에 열쇠였다. 지금도 그 열쇠를 자신의 삶으로 거머쥐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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