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8일 수요일

사랑의 성경 해석학

사랑의 성경 해석학 (예수가족 교회설립 15주년 기념 세미나 발표원고)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독서의 주체와 대상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독자가 고려된 계시의 기록이기 때문에 묵상에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도 필요하고 그런 필요성에 걸맞은 주체의 준비도 뒤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두 가지의 중요성이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39-41).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이끄사 영생을 주시려고 기록한 책입니다. 위의 본문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목적이 영생을 취득하는 것에 있으며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는 것이 마땅한데 그에게로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그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읽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 주님은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취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안에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묵상의 대상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했습니다. 성경은 정보를 전달하는 문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주체의 태도는 성경의 이러한 영적 속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묵상은 성경의 인문학적 벗기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텍스트의 본질은 기호이기 때문에 기호 자체를 인식하는 작업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최종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호가 가리키는 실체에 이르러야 비로소 해석하는 것입니다. 기호의 실체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질 당시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와 떨림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묵상의 주체인 인간의 성경 접근법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는 완곡한 뉘앙스의 언급을 하십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려는 성경 해석학은 우리를 영생과 무관한 길로 이끕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가는 해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는 성경의 이정표를 무시하고 사람의 영광에 허덕이는 인간적인 해석학에 만족의 빈궁한 초막을 짓게 만듭니다. 바울이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죄의 심각성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결단코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어떠한 행위와 상태도 죄에 농락을 당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전까지는 성경을 하나도 읽지 않은 것입니다. 죄의 그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성경읽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떠한 구절을 읽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성경 묵상법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독자에게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으려고 자신에게 나아오지 않는 자들의 문제점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부재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을 기록한 요한은 다른 곳에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안다”(요일4:7)는 명료한 사실을 밝힙니다. 엄밀한 과학적 접근법이 요구되는 듯한 성경 해석학과 하나님의 사랑은 언뜻 보기에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해석학은 사랑과 은밀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해석은 비인격적 문자 해부학이 아닙니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독서는 저자의 마음을 읽는 행위이며 묵상은 저자의 뜻을 궁구하는 일이기에 만약 관계가 틀어져 있다면 저자의 마음은 읽어질 수 없으며 저자의 뜻은 틀어진 만큼 왜곡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문자와 텍스트는 기호로서 저자의 마음과 뜻을 운반하는 수레일 뿐입니다. 일단 생각이 텍스트화 되면 저자가 소외되고 해석의 열쇠는 저자를 떠나 독자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만다는 현대 해석학의 편만한 주장은 텍스트나 문자 자체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장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음의 언어가 활자의 옷을 입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저자의 것이며 저자와 분리되는 순간 무의미해 질 수밖에 없고 의미의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텍스트와 저자의 분리는 해석학에 치명적인 변질과 왜곡을 낳습니다.

성경의 해석이 독자인 인간에게 맡겨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끔찍하고 두려운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인간은 비록 만물의 영장이고 피조물 중에 가장 높은 존엄성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피조물이 타락할 수 있는 상태의 마지막 극한까지 곤두박질 쳤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인간의 중심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상태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상태는 단순한 무의식적 실수나 비의도적 오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정신활동 및 물리적인 행위의 중추요 총화라 할 마음이 전적인 부패의 늪에 깊숙이 잠겨 있습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거짓과 부패의 절망적인 상태를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진술이 맞다면, 이러한 상태의 마음을 소유한 인간의 손아귀에 해석의 열쇠가 맡겨져 있다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아찔하고 불합리한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거짓되고 극도로 부패한 인간은 해석에 관여하지 않을수록 보다 정확하고 온전한 해석이 담보될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의 거짓과 부패가 해석에 관영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방법은 자기를 부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도를 닦아서 무소유, 무아, 무념, 무욕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은 진공의 상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무언가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그릇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부인 방식으로 자신을 비우고 지우고 부정하고 무시하는 소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채우는 방법을 취합니다. 이는 마치 어두움은 빛의 채움으로 해결되고 거짓은 정직의 충만으로 해결되고 더러움은 거룩의 충만으로 해결되고 불의는 공의의 충만으로 해결되고 악한 생각은 선한 생각의 충만으로 해결되는 식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이 요청하는 자기부인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로 채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의 충만이 바로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명시적인 교회의 정의는 성경에 없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충만할 때에 나 자신은 내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기준과 주님의 가치와 주님의 기호와 주님의 방향과 주님의 목적이 내 안에 채워질 때, 나의 가치관도 나의 기호도 나의 판단도 나의 기준도 모두 부인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주께서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살지라도 이제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는 내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삶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삶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 가능성은 사랑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 안에 그대가 혹은 그이가 있고 나는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거기에서 어떤 행위가 산출되는 경우를 우리는 ‘사랑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신비로운 상태에 처하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 자신이 그의 존재로 채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고 그가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나의 시선 머물고 그가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결박되며 그의 눈물이 흐르는 곳으로 나의 발이 향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나의 모든 것들이 마비되고 박탈되고 삭제되는 듯하지만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자율성 속에서 자기가 부인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로운 사랑으로 인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인간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채워져 부인될 때 성경 해석학은 비로소 그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각종 은사들을 구할 때에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은사들 중에는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도 있습니다. 사랑의 방식이 아니면 건강한 지혜와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을 이해할 때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교부들의 성경 해석학 대표격에 해당되는 어거스틴은 성경의 독자에게 삼위일체 하나님만 향유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해석학을 권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가르쳐 준 성경 해석학을 종합한 것입니다. 즉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는 자들이 생명 자체에신 자신에게 나아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예수님의 지적과 같은 맥락에서 지식은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향유 혹은 사랑이 성경 해석자의 으뜸가는 준비라고 본 어거스틴 해석학에 종합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해석학과 관련하여 믿음의 인식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세상의 근원을 아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보이는 모든 것들의 비가시적 근원은 오직 믿음으로 안다고 바울은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와 같습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와 마음의 생각으로 얻는 깨달음은 결코 보지 못하는 것들에 스스로 이르지를 못합니다. 주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귀로도 들리지 않으며 논리적인 인과의 사슬을 동원하여 마음의 생각으로 소급해도 도무지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영적인 도약이 없이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앎은 과연 기독교 인식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도 해석학의 종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바울 자신의 입술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기술한 자신의 서신에서 산을 옮길 정도의 막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아는 것도 부분적인 앎일 뿐이며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수준의 지식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의 주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막5:7)라고 고백한 귀신들도 두려움과 떨림의 반응을 일으키는 정도의 앎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란 결론을 내리면서 사랑에 의해 인식의 원리인 믿음도 상대화될 수 있음을 보입니다. 사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을 포괄하고 있으며 믿음이나 소망보다 개념의 지경이 훨씬 넓습니다. 즉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13:7)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지식과 바라는 소망의 실상과 관계되는 것이지만, 사랑은 모든 보이는 것들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바라고 믿는 모든 것과의 합일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다 알지는 못해도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의 띠입니다. 이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한다”(요일4:16)고 진술한 요한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히포의 주교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단 한 글자도 읽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은 성경 해석학의 처음과 나중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경 해석학이 하나님 사랑에서 시작하여 하나님 사랑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로 보건대 해석은 정보의 생산이 아닙니다. 문자의 해부나 분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쌍방적인 사랑의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의 해석학은 성경의 해석이 인간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주장을 결코 두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벗겨지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하고의 여부에 좌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초래된 파생적인 사랑이지 인간이 사랑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결국 사랑의 해석학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궁극적인 해석은 문자의 기계적인 분석이 아닙니다. 저자와 독자의 긴밀한 교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 당사자의 가장 긴밀한 상태를 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밀어를 나눕니다. 밀어는 다른 이들이 해석할 수도 없고 깨달아 알 수도 없는 말입니다. 성경은 마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적인 밀어와 같습니다. 성경은 원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해석될 수 없도록 기록된 연애편지 같은 것입니다. 자연의 책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영원한 능력은 결코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경의 어떠한 구절도 우리에게 송이꿀의 당분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 이상으로 달았던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런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도 합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사랑하면 읽힙니다. 사랑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그의 뜻을 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결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다 할지라도 인문학적 독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 해석학은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머릿수 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도 그렇고, 자연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듯이 최적의 의미가 생산되는 적정의 차원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극거시 관점은 미세한 존재들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생략하기 쉽고 극미시 관찰로는 존재들과 사태들 간의 네트워크 차원에서 생산되는 의미와 가치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극미시와 극거시를 비롯하여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차원들이 다 존중되고 의미와 가치의 고유한 조각으로 참여하여 어떠한 해석의 가감도 일어나지 않고 통합되고 조화되는 적정선은 바로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의 적정선이 고려된 책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창조해 주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구현 차원에서 모든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며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로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영생의 주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오길 원하셔서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성경인 것입니다. 창조자요 통치자요 구원자요 계시자인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와 계시와 구원은 이처럼 모두 사랑의 차원을 맴돌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어거스틴 해석학이 강조한 것처럼 자연이든 역사든 성경이든 단 한 줄도 읽어내려 갈 수가 없습니다.

인문학적 해석학에 머문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복음을 정보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전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문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해석학은 우리를 심비에 새긴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와 향기로 만듭니다. 즉 입술의 파장이 아니라 인격과 삶으로 빚어낸 성령의 열매로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처럼 우리의 정체성과 상태도 바뀝니다. 성경을 사랑으로 읽고 해석해야 부작용도 없고 역기능도 없습니다.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성경을 읽으면 아무리 난해한 구절을 해석할 때에라도 최적의 의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고려되고 각 구절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다른 어떠한 구절도 훼손되지 않고 제거되지 않는 의미의 적정선에 이르는 유일한 해석도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희미하던 것이 밝아지고 애매한 것이 명료하게 되고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조화의 입맞춤을 하는 해석의 묘미도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성경의 종합적인 해석의 정수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안에 하나님 사랑을 있었다면 영생을 얻으려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사랑의 부재 때문에 해석의 정수인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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