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3일 월요일

나의 기뻐하는 바는?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암4:5)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기쁨에 적응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아모스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뻐하는 바라고 언급하신 항목들을 보면 은밀한 치부가 들킨 듯 얼굴에 뜨거운 수치심이 확 오릅니다. 1)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2)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3)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4) 삼일마다 너희의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6)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해라.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을 내던지는 죄를 저질러도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수은제와 낙헌제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인간의 심연에 깔린 무례한 발상을 따라 꼬집으신 하나님의 말입니다. 수은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화목과 평화를 상징하는 제사이고 낙헌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자발적인 마음의 제사를 뜻합니다.

이러한 구약적인 반어법은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그만이란 신약적인 발상의 무례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 외친 선지자의 불호령은 우리의 죄성도 겨냥한 것입니다. 지금도 불의로 번 돈이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내면 괜찮다며 불법적인 면죄부를 스스로 발부하는 작태가 가관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회개나 하고 몇 푼만 투자하면 약발이 적당히 먹히고 달래지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모스에 기록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기뻐하던 항목들은 지금도 교회 가운데서 상한가를 구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적잖은 분들이 죄를 실컷 저지르고 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땅에서의 음흉한 혜택들과 결탁할 채로 예배당 앞자리에 보이도록 착석하고 고액의 헌금으로 교회의 향방을 주무르고 회개의 겉모양을 갖추고 때때로 주차안내 겸손행보 연출까지 곁들이며 목회자나 성도의 적당한 인지도를 확보하면 안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를 그것도 대단한 경건의 소유자인 양 중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더러 하나님은 죄짓고 제사와 십일조로 무마하는 종교적 가식의 길을 갈 데까지 가보라고 하십니다. 이런 어법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표현에는 죄의 심각성과 진노의 엄중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탓입니다. 체면이나 인정 때문에 서로 괜찮다며 끈적한 동지애를 발휘할 때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세상에서 지적되는 수준의 기독교 불경에 대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시는 엄밀한 기준에 입각한 처신의 긴급성을 느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교회가 기뻐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정직하게 묻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아니 우리 개개인이 성경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체질과 기호를 가지고 있는데도 여전히 편들어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리인 것처럼 지인들의 접대성 두둔을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체질과 기호부터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쁜 칭찬과 두둔은 기대도 말고 살포도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운할 수 있고 관계에 적신호가 올 수도 있겠지만 교회에는 생명력이 더해지고 개인은 경건이 연습되고 복음의 증거는 탄력을 받습니다.

자리만 위태롭지 않아지고 관계성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경건도 헌 신짝처럼 내던지는 꼴불견이 최소한 나에게는 연출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민첩하면 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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