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7일 월요일

선한 싸움을 싸우라

삶은 싸움이다. 그러나 싸움에도 차원과 격이라는 게 있다.

1. 건강 싸움이다. 오늘날 건강보다 치열한 싸움의 대상은 없다. 그러나 시간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이 누리는 승리감은 시한부다. 시한부 집중력만 투입하면 된다. 그 이상은 우상이다.

2. 재정 싸움이다. 먹거리의 확보는 모든 생물의 본능이다. 생계의 유지는 삶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단연 일순위다. 그래서 모두들 치열하게 일하고 치열하게 번다.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위장의 풍만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아깝다. 부하지도 않고 빈하지도 않은 정도로만 덤비면 되는 싸움이다.

3. 시간 싸움이다. 촌음을 쪼개는 건 현대인의 기본이다. 이유는 24시간의 제한적인 시간에 인간의 욕망을 다 담아낼 수 없어서다. 시간은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관리 방식은 욕망의 질과 양을 조절하는 수밖에. 욕망의 단순화와 선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4. 스펙 싸움이다. 이력서에 한 줄을 넣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런 부산한 움직임이 고작 한 줄이다. 우리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어쩌면 단 한 문장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펙의 두께가 몸값을 좌우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스펙이 주님의 호주머니 안의 저울추에 달리우면, 무게값이 달라진다. 땅에서의 스펙은 고작 사람들을 설득하는 수준이다. 적당히만 싸워도 된다.

5. 진리 싸움이다. 옳고그름 문제를 말한다. 이 싸움은 대단히 치열하다. 여기에서 지면 회복의 다른 대체물이 없을 정도로 사활을 거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제대로 안다고 할지라도 땅에 계시된 진리의 분량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이며 게다가 명확하지 않고 희미하게 아는 수준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심판이 내려지는 진리의 싸움은 땅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에서는 진리의 적정선이 있다. 계시가 기준이다. 더 알려고도 말고 덜 알아서도 안되는 기준 말이다.

6. 성품 싸움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싸움의 최고급 차원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되는 사람이 되고 삶을 사느냐의 싸움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기준이 되어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이 때, 우리는 대체로 주변 요인들을 바꾸는 싸움에 몰입한다. 아니다. 싸움의 대상은 성품이다. 성품이 바뀌면 기쁨과 슬픔과 분노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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