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소요리 문답 3-2 선행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1) 공의를 행하고 2) 인자를 사랑하고 3)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미가는 이러한 인간의 도리가 인간의 합의나 추정으로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행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히 보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보이신 이 내용은 미가 선지자가 던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물음의 답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주께서 보이신 선은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는 것과 결부시켜 이해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먼저 공의를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높으신 여호와께 나아가 경배하는 선을 뜻합니다. 여기서 공의(מִשְׁפָּ֥ט, κρίμα)는 사람 편에서의 공정한 행위나 판결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공의로운 행위와 판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의 기준과 개념과 실행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공의는 사람들의 공의에 대한 목마름을 임시방편 차원에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고 요구하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는 하나님의 일인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다윗의 줄기에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와 이 땅에서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역시나 그리스도 예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성육신은 공의로운 심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믿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대등절 문장에서 현재형과 완료형이 동시에 사용된 어법을 쓰십니다. 이는 말씀의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믿음과 불신이란 자발적인 반응의 형태로 내려지는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호세아가 기술한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의를 비같이 쏟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도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신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 불려지는 한 아이가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מִשְׁפָּ֖ט וּבִצְדָקָ֑ה)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말씀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되고 산출된 공평한 판결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세상의 재판관이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책임이고 몫입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공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 온 땅에 말씀의 성육신 즉 완전한 신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밝혔듯이 인간의 증거를 구하지 않으시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하셨기에 우리가 증인으로 이 땅에서 공의를 수행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것도 아니고 전적인 은혜로 그 영광의 직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두번째 본분은 인자(חֶסֶד, 헤세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헤세드"는 변함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 무조건적 사랑, 희생적인 사랑, 값없이 주어지는 무한한 사랑, 받을 자격이 안되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역시나 헤세드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헤세드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을 뜻하면서 동시에 그분이 행하신 헤세드 자체를 사랑하고 추구하고 구현하고 따른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주요 구속자요 통치자요 희생양이 되셨으며 영원토록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의 길을 사모하며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스런 증인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삶으로 보이면서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은 우리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번째는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상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가지이고 예수님은 나무라는 사실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행위 이전의 상태와 관계된 말입니다. 동행이란 단순히 존재상의 공존이나 하나님과 우리가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물리적인 걷기나 행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동행은 의지와 방향과 기호와 가치와 관심과 감정과 동기와 목적과 내용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보이신 것인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문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도 원하고 하나님이 향하시는 방향을 나도 향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가지신 관심을 나도 가지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을 나도 동일하게 느끼며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나의 이유와 목적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신령한 은혜와 복을 주신 이유는 바로 신적인 본성의 참예자가 되는 것에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주님과의 이러한 연합이란 베드로의 이해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한" 동행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과 전방위적 연합은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인데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해야 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하나님도 존중해야 한다는 식의 무례하고 불경한 역발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선이라고 한 미가의 기록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명하시는 도리와 책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로운 인생에 족쇄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고 경배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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