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2일 일요일

사랑의 독특성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5)

사랑의 가장 독특한 속성은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야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마음만 가지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힘으로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할 의지가 있다고 해서 사랑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 우리의 전부가 동원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전부가 그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이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자체도 사랑과 관계된 것인데 가장 명료하게 계시된 형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핵심은 사실 이 계명을 주신 저자로서 "내가"에 해당하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을 하셨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1) 자신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기호와 판단을 따라 사랑의 대상이 정해지지 않고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보내신 자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2) 우리가 원수였을 그때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자세가 되어 있다거나 화해가 이루어진 상태에 비로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풀어지는 때, 상대방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때, 최소한 그런 기미라도 보이는 때가 우리에겐 사랑의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3) 사랑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겨 생명조차 사랑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순수한 개념의 사랑인 경우보다 이윤을 창출할지 모를 투자의 개념에 사랑이란 언어의 옷을 입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의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중심을 파보면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의 준행자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도 타인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도 영혼도 뜻도 힘도 성품도 심지어 목숨도 동원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별 말썽없이 더불어 살 뿐입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여 사랑하며 산다고 자위하며 스스로 속을 수는 있지만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랑은 마음으로 결단하면 닭이 계란을 낳듯 쑥 밀어낼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가 그런 사랑을 본보여야 하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눕거나 걷거나 앉거나 일어날 때에도 말씀을 말하고 이마와 손에도 말씀을 묶어주며 문설주와 입구에도 말씀을 붙여 범사에 항상 연습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이것만을 위해 태어났고 이것만을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형상으로 태어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의 당위성은 사라지만 생존만 있습니다. 생존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 시킵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배우고 따라가는 듯합니다. 이는 세대를 거듭하며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세파에 역류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7000이나 되는군요. 하하하. 이 정도면 낙관도 부당하고 좌절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각자가 주어지는 삶의 분량만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협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선을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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