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3일 목요일

소요리 문답 2-2 성경의 견고성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더라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 (눅16:31)

이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의 결론부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음부로 간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이 그 고통의 처소로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 달라는 놀라운 의리를 보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은 다릅니다. 즉 이미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말씀이 있고 만약 그 글을 믿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그들에게 가더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갈 것이지만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쉽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은 복음이 오면 율법이 소멸되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말씀과 부활의 사건은 회개와 돌이킴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부활을 목격하는 것과 율법을 묵상하는 것의 기능적인 차이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듣지 않으면 부활을 목격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돌이키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아는 분들 중에서도 어떤 기적을 보여주면 보다 확실히 회개하고 믿음도 강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정은 그런 기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일시적인 효과 면에서는 기적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는 역기능도 만만치 않습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꿈과 환상과 다른 예언과 기적에 허덕이지 마십시오. 어떤 요란한 방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적의 사람 엘리야는 바위를 깨뜨리는 강한 바람이나 땅바닥을 뒤흔드는 지진이나 모든 것들을 소멸하는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혹은 부드러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분입니다. 다윗도 눈부시고 획기적인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향유하며 주야로 묵상한 분입니다. 이방인 문둥병자 경우에도 치유가 아니라 예수님과 나눈 대화에서 근원적인 확신을 얻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확신은 엄청난 기적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죽음과 생명, 무와 존재가 교차하는 기적이 믿음의 회개와 확신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물리적인 몸은 세월이 흐르면서 약해지고 죽습니다. 잠시 건강하게 되는 것에 신앙과 가치관을 내맡기지 마십시오.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그렇다고 결국 죽으니까 그냥 죽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일시적인 연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와 소통하는 분입니다. 그런 방식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다른 어떠한 방식보다 좋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최고의 방식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가 우리에게 오는 방식보다 더 탁월함을 예수님의 나사로 이야기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된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영화롭게 하고 향유할 최고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기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질병이 치료되고 불가능한 일들이 성취되는 기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주신다면 큰 은혜로 알고 감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적 추구자로 부르시지 않았고 기적이 어떤 가치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의도하신 가장 보편적인 생의 원리와 방식을 따르는 게 좋습니다. 심은대로 거두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살아갈 때가 죽을 때가 있다는 것 등이 대표적인 원리일 것입니다.

만약 기적을 과도하게 선망하고 기적을 보여준 사람에게 과도한 경외심을 갖는다면 교회에는 권위의 혼란과 무질서가 초래될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가시적인 비본질이 교회의 관심과 에너지와 시간을 잠식하게 될 것입니다. 신비를 동경하는 인간의 충동적인 종교성을 노리는 간사한 이리들의 궤계와 광란은 제어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의 기반은 약해지고 유치한 기적 키재기로 인해 비교와 시기와 질투의 관계성은 독버섯과 같이 교회에 급속도로 번질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에 의해 제어를 받을 때 가장 건강한 것입니다.

사실은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는 기적은 추구해야 목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살고 기동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임을 알리는 신호의 성격이 더 강해 보입니다.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초자연 영역에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과 초자연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개입이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확연하게 알아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초자연적 일들보다 우리에게 익숙하여 자연처럼 보이는 일상의 기적이 더 신비로운 일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우리에게 본고로 믿고 확신하는 것보다 보지 않고서도 믿고 확신하는 것이 더 복되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적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복에 있어서도 보다 낮은 비교급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비교급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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