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소요리 문답 4-4 무한성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는 것입니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제가 건축한 이 성전이 어찌 용납할 수 있습니까? (왕상 8:27)

솔로몬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짓겠다는 아버지 다윗의 성전건축 숙원을 이룬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그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봉헌하는 기도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의 무한성을 위의 본문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땅에 거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도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용납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솔로몬은 너무도 잘 알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건축의 주역인데 생색도 안냅니다.

하늘과 땅과 성전이 하나님의 무한성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기 때문에 가까운 데의 하나님인 동시에 먼 데에도 계신 분이시며 그러한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분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어떤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으면서 모든 시공간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주물 중에 무한성을 가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만 돌려야 할 무한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한성에 익숙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인간화와 유한화가 필히 수반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성 때문에 존재가 무한하며 지혜도 무한하며 사랑도 무한하며 선하심도 무한하며 긍휼도 무한하며 자비도 무한하며 거룩도 무한하며 생각의 규모도 무한하며 계획의 규모도 무한하며 능력도 무한하며 권위도 무한하며 영광도 무한하며 공의도 무한하신 분입니다. 시공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시간적인 무한성 때문에 영원하며 공간적인 무한성 때문에 편재하되 시공간에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신데 피조물의 어떠한 것으로도 저울질할 수 없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주실 정도의 무한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데 세상의 그 어떠한 절망과 슬픔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 없는 영원한 소망과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영광도 주시는데 세상의 그 어떠한 수치와 비참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고 빼앗아갈 수도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무한한 영광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무언가를 주실 때에도 무한한 것들을 주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땅의 유한한 소욕과 남루한 흥정에 들어가고 어리석은 거래에 계약의 손을 내미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지각에 의해서는 다 파악될 수 없는 분입니다. 다 알지도 못하는 분에 대하여 불공평과 독재와 잔인과 모순을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하고 경박한 것입니다. 전두엽에 꼬인 이성의 어설픈 작업이 생산한 불완전한 지식의 유한한 분량으로 하나님의 무한성을 달아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발칙한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판단하는 분이시지 판단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선하시고 자비롭고 의로우신 분으로 계시하도 있다면 우리의 이해나 승인과 무관하게 그러신 분입니다.

계시된 대로 이해된 하나님은 사람의 지각에 의해 측량될 수 없도록 무한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경배의 이유도 되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이유도 된다는 것은 사람이 모든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극도로 은밀한 곳에서 죄를 짓더라도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사실 탓입니다. 범죄의 증거를 아무리 인멸하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거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죄를 짓는다면 죄의 경중은 죄의 대상에게 의존할 것인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죄를 짓는다면 우리의 죄는 무한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나 부과되는 형벌도 무한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 무한한 무게를 견딜 수도 없고 해결할 수는 더더욱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연히 유일하게 무한하신 성자께서 육체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친히 해결해 주시지 않았다면 죄문제는 다른 어떤 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죄를 지었다는 것과 무한한 댓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무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삼아 지불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이렇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공로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믿음과 선행을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공로로 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 만족과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어떠한 피조물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마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쁨은 하나님 바깥에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원인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공로와 연결되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게다가 원인이 아니라 수단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우리의 믿음은 기뻐할 만큼의 가치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인 것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해 주신다는 것은 설명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무한한 은혜와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문한성 안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풀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무한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솔로몬이 세대에 걸쳐 이룩한 위업 앞에서도 건강한 처신이 가능했던 이유도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