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소요리 문답 4-2 영원성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0:2)

하나님은 무한하며 영원하며 불변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의 머리로는 능히 파악되지 않기에 인간이 확실히 아는 것들에서 유추하는 속성의 지식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가 늘상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한계가 전혀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영원성은 피조물의 속성이라 할 시간성이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불변성은 무시로 변하는 피조물의 가변성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성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한성과 시간성과 가변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속성으로 서술될 수 없는 분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서술할 때에는 부정적인 어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이다"가 아니라 부정적인 "아니다"의 술어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어법 사용에 두각을 드러냈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질적인 속성의 제한이 없으신 선이시며(sine qualitate bonum) 분량으로 가늠되지 않으시는 웅대한 분이시며 (sine quantitate magnum) 결핍이 없으신 창조자가 되시며 (sine indigentia creatorem) 처소가 없이 거하시는 분이시며 (sine situ praesentem) 만물을 조건 없이 유지하는 분이시며 (sine habitu omnia continentem) 공간에 제한됨이 없이 도처에 편재하는 분이시며 (sine loco ubique totum)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시며 (sine tempore sempiternum)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시되 변동될 것들을 만드는 분이시며 (sine ulla sui mutatione mutabilia facientem) 외부에서 당하시는 수동성이 없으신 분(nihilque patientem)"이라고 했습니다.

위에 언급된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시기 때문에 시간의 유한한 길이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생에 의해 파악되실 수도 없고 판단 받으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비록 자신에 대하여 처음과 나중이란 표현을 쓰셨지만 그렇다고 시간성이 투사된 '처음'과 '나중' 개념에 근거하여 시간적인 사유의 틀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읽으려는 태도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함을 땅으로 끌어내릴 빌미를 언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구사된 것이었고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때로는 언어사용 중단으로 대응하고 때로는 언어의 역설적인 사용으로 맞서 왔습니다.

언어의 한계와 빈곤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는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는 언어를 개선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도 유한하고 빈곤한 언어의 옷을 입었어도 계시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어로 계시다는 사실에서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기록된 계시가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고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인간 저자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계시가 인간의 오류와 역사의 우연성과 언어의 빈곤에 억류되어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계시를 읽는다면 기록된 계시의 주변적인 요소들 속에 갇히게 될 것이지만 저자이신 하나님의 영으로 조명을 받는다면 결코 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편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 되시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강건하면 기껏해야 80줄에 이르는 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아나고 저녁에 시드는 풀과 같다가 티끌로 돌아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섬광처럼 짧게 지나가는 인생인데 엎친 데 덮치기로 모든 날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고 평생이 한숨 같이 증발하고 만답니다. 이러한 인생을 잘 아는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란 기도를 올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시간적인 생의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시간성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시간적인 인간이 구해야 하는 지혜로운 삶과 관련하여 모세는 1)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주의 종들에게 보이시고 2)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보이시고 3)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고 4)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사 우리의 손으로 한 일들이 견고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립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행하신 일들을 본다는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를 가시광선 수준만 상대하던 눈이 목격하는 것도 다른 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도 놀라운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모든 일들이 덧없는 인생과 더불어 소멸되지 않고 견고하게 보존되는 것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천상의 복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한 인생 전체와 결부되어 있는 실천적인 앎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삶의 동기와 내용과 목적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시간적인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의해 건강하게 정립될 수 있습니다. 땅에서의 유한하고 빨리 지나가는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있으며 그러한 사려를 통하여 우리는 겸손과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이 시간의 짧은 토막을 살아가는 인생의 주먹만한 전두엽 분석을 통해서는 결코 읽혀지지 않습니다. 태초에서 종말까지 스치고 지나간 인생들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 최대치의 집단적인 지성으로 살핀다고 할지라도 영원의 한 귀퉁이도 밝혀내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과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개입하되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언어의 소통으로 우리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육체에 머물러 계시고자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경계선을 한발짝도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를 영원의 영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죄인의 바닥까지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낮추어진 상태로 계속해서 머물러 계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올리실 목적으로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려오신 것만이 아니라 승천까지 하셨으며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하신 것입니다.

살아갈 시간의 날수가 하루하루 줄어들 때마다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살면 살수록 설레임이 커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땅에서의 유한한 삶의 단축에 대한 비애를 극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영원토록 거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땅에서도 영원의 삶을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영원의 삶을 맛본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가 시간적인 길이에 있지 않고 영원한 삶 즉 영생의 소유에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알면서도 옛사람의 시간적인 가치관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 인생관을 강타한 사람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는 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수단은 삶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데도 그 지식에 부응하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입술에서 정보의 파장을 퍼뜨리는 자가 아니라 삶의 파장으로 살아가는 곳곳마다 진동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삶은 그런 하나님을 전파하는 증거의 장입니다. "와 보라"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삶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땅에서의 시간적인 삶으로 하늘의 영원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증인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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